[동서남북] 대선 공약 도그마에 빠진 청와대 경제팀
조선일보 2018.02.01. 03:14
'2020년 최저임금 1만원' 집착.. 고용 감소 조짐 등 부작용 속출
"현장 목소리 듣겠다"고 했지만 듣고도 덮는 건 청와대 아닌가
이희범 현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은 실무형 경제 관료였다. 노무현 정부 시절, 무역협회장이던 그가 서울대 특강 자리에서 입을 열었다.
"장관은 대통령과 독대(獨對)해야 최고 통치자(대통령)의 생각이 달라도 설득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취지였다. 그러자 청와대가 발칵 뒤집혔다. 그러잖아도 노무현 대통령은 언로가 막힌 지도자라고 지적받던 터였다. 무역협회장을 맡기 직전까지 산업자원부 장관으로 2년 넘게 일했던 노무현 정부 각료의 일침(一鍼)이었기에 더 충격적이었다.
집권 세력은 노발대발했다. 양정철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은 "대통령 독대를 못 해 일을 못 하거나 설득 못 하는 장관이 있다면, 본인의 무능이거나 타 부처와 협의가 덜 된 때문"이라고 쏘아붙였다. 장관들 의견에 귀 기울이겠다는 말은 없었다.
얼마 전 청와대는 문재인 대통령이 김동연 경제부총리로부터 매월 보고를 받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독대 시작'을 선언한 것이다. 이를 두고 전직 경제부처 장관은 "이명박 대통령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장관이나 참모들과 독대를 자주 했고, 박근혜 대통령은 많지는 않았지만 수시로 장관들을 불렀다"며 "독대는 대통령이 필요할 때 하는 당연한 건데, 지금까지 독대를 안 했다는 소리로 들려 오히려 이상하다"고 했다.
청와대의 독대 발표는 사실 '쇼'였다. 김 부총리는 이전에도 2~3주마다 대통령을 독대해왔다. 관가에선 청와대의 이례적인 발표를 그간 '김동연 패싱'(주요 의사 결정에서 김 부총리 배제)을 의식한 늘공(직업 공무원) 달래기용 이벤트로 보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엘리트 공무원을 배제한 채, 캠프 출신이나 시민 단체, 학자 그룹을 중용해 왔다. 그러다 연초부터 최저임금 인상 후폭풍이란 벽에 부닥쳤다. 올해 최저임금을 급격하게 올린(16.4%) 부작용으로 고용이 감소할 조짐을 보이자 청와대가 놀란 것이다.
장하성 정책실장과 홍장표 경제수석 등 교수 출신 청와대 경제팀이 직접 점검에 나섰지만, 김밥집 종업원과 설렁탕집 사장에게서 핀잔을 들었다. 현장에선 최저임금 인상 정책이 잘못됐으니 고쳐달라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경제팀은 바꿀 생각이 없다. 자신들이 주도한 소득주도성장의 핵심이 임금을 올려 소비를 늘리고 그 힘으로 성장하겠다는 건데, 최저임금에 손을 대는 건 소득주도성장 이론의 근간을 뒤흔든다고 보기 때문이다. '2020년 최저임금 1만원 달성'이란 대선 공약이 경제팀에게 도그마(dogma·독단적 신념)가 됐고 거기에 예외 없이 맹종(盲從)하고 있는 모양새다.
김동연 부총리는 최저임금 인상을 현실에 맞춰 추진하자는 '속도 조절론'을 주장해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러나 최근 독대에서 최저임금 속도 조절론을 듣지 못했는지 엉뚱한 지시를 내린다. 일자리 지표가 엉망이니 모든 부처가 일자리 만들기에 나서라고 주문한 것이다. 급기야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은 "당장 거리로 나가 일자리 실적을 올리라"며 공무원들을 닦달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30일 열린 장·차관 워크숍에선 "정책의 당위와 명분이 있더라도 현장 목소리를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추진한다면 첫 단추를 잘못 끼우는 결과가 되기 십상"이라고 했다. 하지만 현장 목소리를 듣고도 덮는 쪽은 청와대다. 김영삼 정부 때에도 나웅배 부총리가 경제 위기를 경고하며, "고비용-저효율 구조 개선이 시급하다. 금리 내리고 노조가 정리해고제를 받아들이도록 해야 한다"고 진언했지만 지지를 얻지 못했다. 결과는 2년 뒤 외환 위기라는 국가적 대참사였다.
[편집국에서] 소리 없이 한국을 빠져 나가는 기업
한국경제 2018.02.01. 00:08
가전·자동차·철강 업체들 줄줄이 미국으로
한국 정부는 여전히 일방적 정책 지시만
“82만9000평방피트 면적에 2억5000만달러를 투자하는 LG전자 공장은 600개의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삼성전자는 3억8000만달러를 투자해 향후 3년간 950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최근 한국 전자회사들의 미국 세탁기 공장 건설 현황을 전하는 미국 언론들의 기사다. 두 회사 모두 준공을 앞당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 조치로 관세 폭탄을 맞게 됐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면 한국 신문기사에는 없는 숫자가 하나 있다. 일자리다. 해당 기업이 한국에서는 공개하지 않은 숫자다. 의도적이다. 담당자들은 “어쩔 수 없이 나가야만 하는 사정을 알지 않느냐”고 설명했다.
해외로 나가는 것은 대기업만의 얘기가 아니다. 중견 철강업체 넥스틸도 미국으로 생산시설을 옮긴다. 트럼프 정부가 1년 만에 관세율을 8%에서 46%로 올리면서 지난해 9월부터 대미(對美) 수출이 중단됐다. 결국 1년에 100억원을 버는 회사(2016년 기준)가 300억원을 들여 미국 휴스턴에 공장을 짓기로 했다.
가전, 자동차, 철강에 이어 석유화학업체들도 미국으로 나갈 태세다. 휴비스는 태국 기업과 합작해 미국에 법인을 설립한다고 지난달 발표했다. 상반기 안에 현지 공장 투자 규모를 확정할 계획이다. 대림산업도 미국에 석유화학단지 개발을 추진하기로 했다. 경기가 살아나면서 시장 수요가 커지고 있는 미국에 먼저 자리를 잡기 위해서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상황이 생각보다 매우 심각하게 돌아간다”며 “이러다간 섬유업체까지 나갈 판”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빠져나가는 일자리가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다. 정부는 ‘생기는’ 일자리는 챙기지만 ‘나가는’ 일자리는 집계하지 않는다. 기업들이 공장을 미국으로 옮기는 이유가 트럼프 때문만일까. 기업인들은 “돈이 전부는 아니다”고 말한다. 정부가 법인세 최고세율을 25%로 올렸지만 세금을 더 내는 것은 아깝지 않다고 말한다. 대신 의욕을 꺾지 말라고 주문한다.
단적인 예가 “일단 모이세요”다. 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기업에서 정부를 상대하는 대관(對官) 담당자들이 부쩍 자주 듣는 소리라고 한다. “무엇이 필요합니까” 혹은 “어떻게 도와드릴까요”가 아니다. 대통령의 현장 방문에 대비한다는 이유로 하루 전날 불쑥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를 부른다. 신년 간담회에 30분 넘게 지각해서 “최저임금 인상 방침에 잘 따라달라”는 일방적인 훈시만 하고 자리를 뜨는 장관들의 행태에 기업인들은 마음을 접는다.
많은 기업인 사이에서 이 정부의 별칭은 ‘알아서’다. 국가적 대사에는 ‘알아서’ 협조하고, 최저임금 인상 여파는 ‘알아서’ 흡수하고, 근로시간 단축이라는 획일적 지침도 ‘알아서’ 맞추고, 미국 등의 보호무역주의도 ‘알아서’ 피해가라는 비아냥이다.
기업들은 상품을 만들어 경쟁한다. 고객이 외면하면 망한다. 정책의 고객은 국민과 기업이다. 기업도 정책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여지도 없이 정책을 강요해 놓고 ‘알아서 맞추라’고 하면 기업들은 외면할 수밖에 없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일자리 감소로 나타난다.
이심기 < 산업부 차장 sglee@hankyu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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