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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욱 교수 명랑笑說] 너희들이 '정체성'을 아느냐

바람아님 2018. 2. 15. 17:47

(조선일보 2015.09.05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



[남정욱 교수 명랑笑說]


'정체성'을 주제로 강연 요청이 들어왔다.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가 어떤 나라이고 대한민국에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짚어달라는 주문이겠다.

대략 난감이 아니라 심히 난감이다. 답은 쉽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주적은 북한이고(물론 북한 주민들을 말하는 건 아니다)

우방은 미국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수구 보수 꼴통'이 되어 버린다.

그렇게 찍히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하고 돌을 맞는 상황 자체가 싫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래. 고맙게도 소생의 고민을 김정은이 한 방에 해결해 줬다.

적어도 안보에 관한 한 대한민국은 정신을 차린 것 같다. 옛 선인의 말에 '전쟁은 난폭한 교사(敎師)'라고 했다.

적당히 난폭한 수준에서 배우고 깨달았으니 그 또한 다행이다.

거기에 더해 1953년에 맺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까지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니 그것도 소득이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조약을 체결하면서 "이것이 앞으로 우리 민족을 편하고 잘살게 해 줄 것"이라는 예언 같은

말을 남겼다. 예언은 위기 때마다 우리를 살렸다.


문제는 또 하나의 정체성인 자본주의라고 불리는 시장경제다.

자본주의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체감온도는 영도(零度) 아래다. 차갑고 냉혹하고 비인간적인 느낌뿐이다.

자본주의는 19세기의 발명품이 아니다. 교환, 거래, 이윤 추구 같은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한 건

까마득한 신석기시대부터다. 타고난 인간의 심성이 자본주의적이라는 얘기다.


일러스트


지중해를 제패한 페니키아 사람들이 무역, 화폐, 어음 등을 구사하면서 자본주의 시스템은 완성된다.

그리고 그것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는 과정이 인류의 역사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시스템은 '선함'과 '옳음'에서 출발한 게 아니다.

최대 다수의 '이기심'을 보장하는 것이 모든 제도의 시작이다.

이기심을 강제로 포기해야 했던 사람들을 핑계 삼아 등장한 게 사회주의다.

사회주의 운동의 오류는 '보완책'을 '대안'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시장이 아니라 인간을 손보는 실험이 벌어졌고 모조리 실패했다.

그리고 그 폐허에서 다시 자본주의를 시작해야 했다.

자본주의 남베트남을 멸망시킨 공산주의 북베트남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간 길은 남베트남이 갔던 길이었다.

시간만 까먹었다.


자본주의 경제의 핵심은 시장 원리와 기업가 정신이다.

마르크스 경제학은 이렇게 말한다.

"노동자가 여덟 시간 일한 것의 반은 노동자의 몫, 나머지는 자본가의 차지." 절반만 맞다.

이 명제가 타당하려면 그렇게 생산한 상품이 시장에서 다 팔려야 한다. 그런 일은 없다. 시장은 냉정하다.

더 싸고 더 좋은 제품이 나오면 나머지는 싹 반품이다.


이윤에 대한 올바른 설명은 자본가가 착취한 노동이 아니라 기업가의 도전 정신에 대한 시장의 보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학기부터 고려대, 연세대, 한양대 등 3개 대학이 정규 강의로 '대학 기업가 강좌'를 신설한 것은

신선한 발상이다. '가장 탐욕스러운 자에 의해 착수되었고 가장 냉혈한 자에 의해 강화되었으며 가장 무능한 자에 의해

정체가 드러난' 것으로 규정했던 시장경제에 대한 80년대식 사고는 끝날 때가 되었다.

정체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동의 아래 교육되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