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화가 가타야마 탄이 그린 '언덕', 1935, 169x186cm, 천에 채색, 개인소장. [사진 부산시립미술관]
황토색 치마에 하얀 저고리를 입은 여인이 머리에 커다란 광주리를 얹고 댕기 머리의 소녀와 함께 나란히 걷고 있다. 곱게 차려입은 두 사람은 장에 다녀오는 것일까. 1935년 한 이방인의 시선으로 포착한 풍경이 풍성한 색채로 표현돼 있다. 일본인 화가 가타야마 탄이 그린 그림( '언덕'(丘)')이다.
이보다 앞서 1929년에 다른 일본 작가가 그린 유화 '시장풍경'은 더 섬세하고 리얼하다. 손바닥만 한 종이에 그린 그림이지만, 마치 시장통의 웅성거림이 들려올 듯이 생생한 풍경이 담겨 있다.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있는 여인들과 좌판을 늘어놓은 상인, 지게를 진 소년, 지나가는 아이들과 개도 눈에 띈다. 1927년부터 35년까지 부산에 머물며 조선인의 일상을 관찰하며 많은 그림을 남긴 안도 요시시게(1888~1967)의 작품이다.
부산시립미술관이 개관 20주년을 맞아 오는 16일부터 2개의 특별한 기념전을 연다. 근대 미술이 시작된 일본 강점기 때기 부산미술의 역사를 살피는 '모던·혼성:1928~1938' 전과, 한국전쟁 발발로 꽃 핀 부산의 미술문화를 조명하는 '피란수도 부산:절망 속에 핀 꽃'이다.
'모던, 혼성:1928~1938'은 통해 일제강점기 부산에서 활동했던 일본 작가들의 작품과 더불어 부산 지역에서 최초로 서양화를 시작한 작가들의 작품을 대거 소개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동안 근대미술사에서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던 부산 근대미술의 시작점을 엿볼 기회다.
1900년대 초반 부산은 외부 문물이 활발히 들어오던 창구였다. 1905년 일본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잇는 부관연락선이 개통되면서 많은 일본인이 부산으로 밀려들어 왔고, 이들 중엔 화가들도 많았다. 이를테면 안도 요시시게는 일본에서 중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악기상을 운영하던 부모를 따라 부산에 머물며 부산 풍경 그림을 많이 남겼다. 요시시게는 28년부터 시작된 '부산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며 부산 지역 미술인들과 교류하며 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당시 부산에 온 일본인 화가들이 있었다면, 또 다른 한편엔 일본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돌아오거나 유학생으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서양화 작업을 시작한 한국 작가들이 있었다. 임응구(1907~1994)와 우신출(1911~1992), 김종식(1918~1988) 등이다.
부산 최초의 서양화가로 꼽히는 임응구(1907~1994)는 28년 도쿄미술학교에 입학해 일본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돌아왔고, 우신출은 33년 열린 임응구의 개인전을 보고 그에게 개인 지도를 청하며 유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부산 근대미술의 선구자로 손꼽히는 김종식(1918~1988)는 작가이자 교육자로 부산의 근현대 미술계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번 전시에선 부산에 체류하며 작업한 작가뿐 아니라 여행 등의 이유로 부산을 거쳐 간 일본인 작가들의 그림, 부산 최초의 서양화가 모임인 '춘광회' 작가들의 그림까지 망라해 작품 149점, 자료 80여점을 볼 수 있다. 이들 중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김종식(1918~1988)은 5월 25일 시작하는 '부산의 작고 작가, 김종식 전'을 통해 별도로 집중 조명될 예정이다. 그의 작품과 아카이브 등 200여 점이 나오는 대규모 전시로 추상화와 풍경 유화, 흑백드로잉 등 화업 전반을 아우른다.
김선희 부산시립미술관 관장은 "1930년대를 생각하면 흔히 경성을 먼저 떠올리지만, 당시 부산은 서울 못잖게 신문화가 활발하게 유입돼 미술 문화가 역동적으로 태동한 시기"라며 "이번 전시가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소외돼 있거나 등한시됐던 부분을 드러내는데 의미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2부 전시 '피란수도 부산:절망 속에 핀 꽃'은 1950년대 한국전쟁의 피란지였던 부산에서 활발히 일어났던 미술문화 현상을 조명한다. 전쟁으로 전국의 미술가들이 당시 부산으로 오면서 부산에서 섞인 피란 작가들과 부산·경남의 화가들의 작품 101점을 보여준다. 장욱진의 '자갈치 시장', 양달석의 '판자촌', 김환기의 '판자집' 등 당시 피폐했던 의 풍경과 이산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담긴 그림들이다.
미술관은 당시 전국 지식인들의 집결지였고 동인전 무대이기도 했던 '다방'을 조명하는 자리도 마련했다. 2부 '피란수도:절망 속에 핀 꽃'을 큐레이팅한 박진희 학예연구관은 "당시 다방 지도, 다방에서 전시에 대한 리뷰 기사, 방명록 해제 등 다양한 자료를 한자리에 모았다"며 "근현대 문화사의 새로운 맥락에서 부산의 숨겨진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7월 29일까지.
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