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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전당 '명재 윤증' 특별전] 거물 송시열에 맞선 '백의정승'의 삶 들여다보니

바람아님 2018. 4. 2. 15:10

(조선일보 2018.04.02 유석재 기자)


예술의전당 '명재 윤증' 특별전
'신유의서' 초고본·초상 등 전시

"이 편지를 정말 보낼 생각이오? 큰일 나오!"


1788년에 그린 윤증 초상, 보물 1495호.1788년에 그린 윤증 초상, 보물 1495호.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소장


조선 숙종 7년인 1681년, 유학자 윤증(1629~

1714)이 쓴 편지를 보고 지인 박세채가 기겁했다.

'선생께서는 의리와 이익을 함께 행하고

(의리쌍행·義利雙行) 왕도와 패도를 같이

썼습니다(왕패병용·王霸幷用).'

한마디로 인의(仁義)로 천하를 다스리는

척하면서 권모술수로 이득을 취했다는,

성리학자들의 세계에서 더 없는 비난이었다.


편지의 수신인은 송시열이었다. 조정의 최고

실력자이자 한때 윤증의 스승이었던 송시열!

끝내 부치지 못한 이 편지의 내용이 새어

나가면서 정국은 소용돌이로 빠져든다.


서인(西人) 세력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는

분기점이 된 이 편지가 '신유의서(辛酉擬書)'다.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5월 13일까지

열리는 특별전 '명재 윤증'에선 이 편지의

초고본을 볼 수 있다.

기품이 깃든 글씨로 또박또박 적다가도, 곳곳에서

글자에 줄을 긋고 종이를 덧대는 등 수정과

가필 흔적이 숱하게 보인다. 뭇 사람들에게

충격적 반항으로 보였던 편지는 대단한

고심과 퇴고 끝에 작성된 것이다.


윤증은 86년 생애 동안 한 번도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임금이 우의정을 준다고 해도 고사해

'백의정승'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송시열의 노론에 대항하는 소론의 영수로 추앙받았다.


명필로 유명한 집안답게 글씨도 뛰어났다.


전시에 나온 '명재 친필 주자시' '명재 친필 8폭 병풍' 등에선 경쾌하면서도

호방한 초서가 돋보이며, 세심하게 쓴 편지에선 주변을 배려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신유의서 사건이 적발됐을 때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선 "입을 굳게 닫고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결의를 보였고, 과거시험 준비에 몰두하는 제자에겐 "시골에서 조용히 마음을 지키며

독서하는 것이 서울에서 힘을 낭비하고 세월을 헛되이 보내는 것보다 낫다"고 충고한다.


보물 1495호로 지정된 '윤증 초상'과 경종 임금이 윤증에게 내린 '시호 교지',

아버지 윤선거와 백부 윤문거 등 명필 삼형제의 글씨를 모은 '노성삼선생필적' 등도

함께 전시된다.

(02)580-1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