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0.08.16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1986년 아르헨티나 태생의 영국 가수 크리스 드 버그(Chris de Burgh)가 불러 영국과 아일랜드는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붉은 옷을 입은 여인(The Lady in Red)'이라는 노래가 있다. "나는 이렇게 많은 남자들이 당신에게 춤을 추자고 몰려드는 걸 본 적이 없다오…나는 당신이 그 드레스를 입고 있는 걸 본 적이 없다오…오늘 밤 당신의 모습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오…."
붉은색이 여성의 성적 매력을 돋보이게 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 미국 로체스터 대학 심리학자들의 실험에 따르면 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란다. 동일한 남성의 사진에 각각 붉은색 테두리와 흰색 테두리를 두르거나 컴퓨터로 남성의 셔츠 색깔을 붉은색·회색·녹색·파란색 등으로 조작한 사진을 여학생들에게 보여주며 남성의 사회적 지위, 성적 매력, 호감도 등에 대해 물었다고 한다. 결과는 붉은색이 남성의 지위, 장래성, 성적 매력 등을 한층 높여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자들은 동일한 결과를 미국뿐 아니라 영국, 독일, 그리고 중국에서도 관찰했다. 인간의 붉은색 선호에는 문화적 영향보다 훨씬 더 깊은 생물학적 근거가 있음을 의미한다.
아프리카의 카메룬과 가봉 지역의 열대우림에 서식하는 맨드릴(mandrill)이라는 개코원숭이의 암컷들도 훨씬 더 강렬한 붉은색을 띤 수컷을 선호한다. 그 지역에 사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사회에도 높은 지위의 남성들이 종종 붉은색으로 치장하는 풍습이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의 고대 국가들에서도 붉은색은 권위와 지위의 상징이었다. 최근에는 우리 정치인들이 소통과 희망의 표현으로 파란색 넥타이를 자주 매지만 자신감과 리더십을 나타내는 데에는 역시 붉은색 타이가 제일이다. 시상식장으로 향하는 배우들도 붉은 카펫 위를 걷는다.
그런데 붉은색에 대해 섭섭한 게 하나 있다. 우리말에는 붉은 빛깔을 묘사하는 수많은 형용사들이 있지만, 성적 문맥에서 쓰이는 영어의 'red'를 제대로 표현할 말이 없어 보인다. '붉은'은 어딘지 미흡하고 '빨간'은 너무 천박하다. '새빨간'은 너무 드세고 '시뻘건'이나 '검붉은'은 그저 음침해 보인다. 우리 형용사들이 이렇게 '풍요 속의 빈곤'을 겪을 줄이야.
(참고 사진 - The Lady in 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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