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1.01.14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1781년 가을, 아프리카를 떠나 자메이카를 향해 항해하던 영국의 노예운송선 종(Zong)호는 너무 많은 노예를 싣고 있었다. 식량이 떨어져 가고 전염병이 돌아 7명의 선원과 60명의 노예가 죽었다. 만일 병든 노예들이 목적지에 도착한 후 육지에서 죽으면 선주는 큰 손실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들이 해상에서 죽으면 한 명당 30파운드의 보험금을 받을 수 있었다. 다만 병으로 죽거나 자살한 경우는 해당되지 않고, 반란을 일으킨 노예를 살해하거나 위급한 상황에서 배를 구하기 위해 바다에 던진 경우에만 보험금 청구가 가능했다. 콜링우드 선장은 122명의 병든 노예들을 선별한 후 11월 29일에 54명, 11월 30일에 42명, 12월 1일에 26명을 차례로 바다에 던져 익사시켰다.
후일 선장은 물이 부족해서 '선박의 안전을 위해' 노예들을 바다에 던진 것이라 주장하며 보험금을 청구했다. 그렇지만 자메이카에 도착했을 당시 이 배에 420갤런의 물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보험회사는 보험금 지급을 거부했다. 결국 이 사건은 법정으로 갔다. 1심에서 선장과 선주에게 유리한 판결이 나자 보험회사는 불복하여 항소했다. 이 2심 재판은 곧 노예무역 찬성론자들과 금지론자들 간의 대립으로 유명해졌다. 이때 국왕법률자문관은 "이 사건은 말을 바다에 집어던진 것과 똑같은 사례"라는 발언을 해서 물의를 일으켰다. 2심 판결은 선상에 물이 충분한 것으로 볼 때 선장이 관리를 제대로 못한 책임이 있으므로 보험금을 청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직 그뿐, 흑인 노예 학살에 대한 책임은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선장과 선원들을 살인죄로 기소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이번에도 국왕법률자문관은 흑인 노예는 엄연히 상품이자 재산이며, 선원과 배를 구하기 위해 노예를 바다에 던짐으로써 정당한 임무를 다한 선장을 고발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곧 노예무역의 비인간성을 고발하는 상징이 되었으며, 노예무역 금지 운동을 촉발시킨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김영나의 서양미술산책'(조선일보 1월 5일자 A34면)에 소개되었던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의 '노예선'도 이 사건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The Slave Ship
Turner-The Slave Ship(부분 확대-1)
Turner-The Slave Ship(부분 확대-2)
Turner-The Slave Ship(부분 확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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