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고전·고미술

[겸재정선이 본 한양진경] <36>창의문(唱義門)

바람아님 2013. 11. 1. 11:38

(출처-동아이보 2002-12-20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창의문은 한양 도성 4소문(小門) 중 서북문에 해당하는 성문이다. 이 문을 나서면 현재 종로구 신영동 평창동 일대의 장의사 

계곡으로 이어진다. 이곳을 흐르는 홍제천을 따라가면 서대문구 홍제동 홍은동 녹번동으로 이어지는 문산대로로 연결된다. 따라서 개성 이북의 황해도나 평안도로 내왕하는 길손들은 이 문을 지름길로 삼았으니 서대문 못지않게 내왕이 빈번했다.

창의문의 별호 자하문(紫霞門)의 줄임말인 ‘자문’으로 애칭되며 서민들의 통행문으로 사랑받아 왔다.

이 창의문은 서울 도성이 완성되는 조선 태조 5년에 세워져 지금까지 600년 넘게 그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그런데 그 문루는 영조 17년(1741)에 처음 세워진다. 아마 국초에는 4소문을 4대문과 구별짓기 위해 월단만 두르고 문루는 세우지 않았던 모양이다.

진경문화가 절정기에 이르는 영조대에 와서 조선이 곧 중화라는 자존의식에 따라 세계적인 도읍의 위용을 갖추기 위해 이 창의문부터 문루를 세우기 시작한다. 명분은 인조반정(1623) 때 창의군(唱義軍·의를 부르짖은 혁명군)이 들어온 문이니 이를 보수하고 문루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그림은 현재 경복고 자리에서 올려다보고 그렸을 듯하다. 북악산과 인왕산 자락이 내려와 마주치는 곳에 창의문을 내었는데 그곳에 문루를 세워놓으니 양쪽 산 능선을 따라 이어진 석성(石城)이 마치 독수리가 날개를 펼치는 듯한 모습이다.

지금은 청운중과 벽산빌리지, 많은 민가가 들어서 사람 사는 동네로 바뀌어 있지만 겸재 당시에는 이곳이 이렇게 집 한 채 없는 첩첩산중이었던 모양이다. 작고 큰 바위들이 군데군데 널려 있고 그 사이사이로 솔숲이 우거져 있으며 골짜기마다 개울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보기만 해도 한적하고 그윽한 느낌이 절로 일어난다.

인왕산 맨 북쪽 봉우리인 벽련봉(碧蓮峯)은 한 덩어리의 거대한 바위로 이뤄진 백색 암봉(岩峯)이다. 이 그림에서 보면 그 위에 축구공같이 생긴 바위 하나가 올려져 있다. 이 부침바위는 지금도 있다.

겸재는 경복고 자리에서 태어나 51세까지 살다가 옥인동20 인왕곡으로 이사간 다음 그곳에서 84세에 돌아갔다. 그렇기 때문에 북악산과 인왕산에 어떤 바위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래서 벽련봉 부침바위를 이렇게 표현해놓을 수 있었다. 겸재가 진경산수화에서 내재된 아름다움까지 표출했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영조 26년(1750)경 비단에 엷게 채색한 29.3×33.5㎝ 크기의 그림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부침바위 사진 이미지(인터넷 자료)

사진 속의 바위도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빌었던 바위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위 면 여러 곳에 알 모양으로 패여 있어 '알바위'라고 부를 만도 합니다.


이 바위가 있던 곳은 일제강점기 당시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부암리(京畿道 高陽郡 恩平面 付巌里)라고 합니다. 

그곳은 지금 서울 종로구에 있는 부암동을 말합니다. 

이 바위에는 자신의 나이만큼 돌을 문지르면 손을 떼는 순간 바위에 돌이 붙고 아들을 얻는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바위를 '부침바위', 즉 '부암(付岩)'이라고 불렸는데, '부암동(付岩洞)'이라는 지명도 이 이름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바위가 아직도 그곳에 남아 있을까요? 

이미 짐작이 되었겠지만, 이 바위는 '부암동'이란 이름만 남기고 없어졌다고 합니다. 

<출처-무라야마 치준(村山 智順, 1891~1968)이 일제강점기 때 찍은 사진들>

http://hanulh.egloos.com/m/4959198


[기념표석](종로50)부침바위 터(付岩址)


[겸재 정선 그림 속 길을 간다 (3) 창의문 下]
‘창의문도’에 숨겨진 해골모양바위의 비밀
(부침바위 자료사진. 부암동이란 지명은 이 바위에서 유래했다)
http://weekly.cnbnews.com/news/article.html?no=124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