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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의 麗水漫漫] 인생을 바꾸려면, 공간부터 바꿔야 한다!

바람아님 2018. 5. 2. 08:24

(조선일보 2018.05.02 김정운 문화심리학자·나름 화가)


自意識은 공간의 통제와 밀접하게 연관
자기 공간이 있어야 자존감·매력도 커져
사랑할수록 他人의 마음도 천천히 열기를


김정운 문화심리학자·나름 화가김정운 문화심리학자·나름 화가


여수에 살면 뭐가 좋으냐고 묻는다. 파랗다! 하늘도 파랗고 바다도 파랗다.

그러나 정말 피부로 느끼는 행복감은 운전이다. 차가 전혀 안 막힌다.

아무리 막힐 때도 신호등 한 번 바뀌는 정도만 기다리면 된다.

여수시의 주차 시스템 또한 환상적이다.

곳곳에 공용 주차장이 있고, 처음 1시간은 무조건 무료다.

최근 내가 여수시로 주소를 이전한 이유도 이 착한 도시에 세금을 제대로 내기 위해서다.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끔찍한 환경에 놓여 있는지 모른다.

내가 서울에서 운전하며 가장 괴로울 때는 차선을 바꿀 때다.

다들 '차선 바꾸겠다는 신호'를 '빨리 달려오라는 신호'로 받아들인다. 잽싸게 달려들어 차선을 바꿀 여유를 절대 안 준다.

어어, 하다 보면 뒤에서 빵빵거리며 난리 난다. 정신이 혼미해지며 그냥 울고 싶어진다. 주로 남자들이 그런다.

한국 남자들은 자기 자동차 앞을 양보하면 인생 끝나는 줄 안다. 도대체 왜들 이러는 걸까?


자동차 안이 유일한 자기 공간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집의 안방은 아내 차지가 된 지 오래다.

아이들도 이제 안방을 '엄마 방'이라고 한다. 거실은 TV와 뜬금없이 커다란 소파가 차지하고 있다.

아이들은 각자의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

코를 심하게 골아 같이 잠을 못 자겠다는 아내의 불평에 거실 소파에서 잠을 청한 지 이미 수년째다.

수면 무호흡으로 이러다 죽겠다 싶어 새벽에 잠을 깨면 거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그래서 자동차 안이 그렇게 행복한 거다.

한 평도 채 안 되지만 그 누구도 눈치 볼 필요 없는 나만의 공간이다.

밟는 대로 나가고, 서라면 선다. 살면서 이토록 명확한 '권력의 공간'을 누려본 적 있는가?

그러니 도로에서 누가 내 앞길을 막아서면 그토록 분노하는 거다.


‘마음의 문은 밀어 여는 거다!’
‘마음의 문은 밀어 여는 거다!’ /그림=김정운


한때 자동차가 특이하게 '의미 있는(?)' 공간일 때가 있었다.

총각 시절, 나는 한강에서 자주 낚시를 했다. 밤늦게 보면 고수부지 으슥한 곳마다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죄다 창문에 김이 서려 있었다. 난 자동차에 다가가 차창을 '똑똑' 두드렸다. 창문은 매번 위쪽만 살짝 내려왔다.

나는 그 틈에 입을 대고 소리쳤다. '예수 믿으세요!' 그러고는 냅다 달아났다.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한 것 같아 참 많이 뿌듯했다. 지금 생각하면 두들겨 맞지 않은 게 다행이다.

철없던 시절 이야기다. 이젠 안 그래도 된다. 그런 공간은 외곽에 아주 많다.

그러나 한국 사내들이 진지하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따뜻한 공간'은 없다.

모든 문제는 거기서 시작된다.


'인생을 바꾸려면 공간을 바꿔야 한다.'  학자 앙리 르페브르가 쓴 말년의 역작 '공간의 생산' 핵심 내용이다.

공간은 그저 비어 있고, 수동적으로 채워지는 곳이 아니다.

공간은 매 순간 인간 상호작용에 개입하고, 의식을 변화시킨다.

오늘날 '문화연구(cultural studies)'에서 '공간'은 아주 새롭게 각광받는 주제다.

그동안 '시간(time)'에 밀려 시답잖게 여겨졌던 '공간(space)'이 갖는 문화적 기능을 적극적으로 탐색하려는

학자들의 시도를 '공간적 전환(spatial turn)'이라고 부른다.


프랑스의 역사가 필리프 아리에스는 '사생활'의 탄생을 '침실'이라는 공간과 연계하여 설명한다.

응접실이나 식당과는 구별된 '침실'이 만들어지면서 '사생활'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근대 부르주아의 삶에서 '침실'은 그저 잠자는 곳이 아니었다.

침실은 아기가 태어나고, 사랑을 하고, 부부가 늙어 세상을 떠나는 장소였다.


'행복한 가족'은 이 새롭게 생겨난 '침실'이라는 공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오늘날 출산과 죽음의 기능은 병원으로 옮겨졌고, 사랑도 뜸해졌다.  이제 침실에서는 그냥 잠만 잔다.

아리에스가 설명한 근대적 의미의 '가족'은 이제 해체되고 있다.


20세기 초, 버지니아 울프는 연간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을 가진다면 여자들도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했다.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 남자들에게도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한국 남자의 이 몹쓸 분노와 적개심은 '아파트'라는 매우 한국적인 주거 공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전통 가옥에는 '사랑방'이라는 가부장적 공간이 아주 폼 나게 있었다.

그러나 아파트가 들어오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남자의 공간은 사라지고 아주 못된 가부장적 습관만 남았다.


심리학적으로 자의식은 공간의 통제감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어느 날부터 아이들이 자기 방문을 잠그기 시작한다. 주체적 개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 달라는 거다.

공간이 있어야 주체 의식도, 책임감도 생긴다.

TV 보는 게 전부인 거실을 없애서라도 남자의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안 되면 땅굴이라도 파야 한다.


은은하게 조명을 밝히고,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자기가 좋아하는 물건도 쭉 늘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

공간이 있어야 '자기 이야기'가 생긴다. '자기 이야기'가 있어야 자존감도 생기고, 봐줄 만한 매력도 생기는 거다.

한 인간의 품격은 자기 공간이 있어야 유지된다.

아, 자기 전에 그 공간에서 하루를 성찰하며 차분히 기도도 드려야 한다.

자다가 아예 영원히 잠들 수도 있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주위에 이미 여럿 그렇게 갔다.


사소한 거 하나 더. '자기만의 방' 출입문은 꼭 밀어서 여는 문이어야 한다.

조금씩만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당겨 열면 방 안이 한 번에 다 들여다보인다.

그래서 침실 문이 죄다 밀어 여는 방식인 거다. 한 번에 다 보이면 서로 낭패다.


타인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아주 천천히 밀어 여는 거다.

사랑할수록 조금씩 밀어 여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