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06.30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사진이 다 말해 주었다'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필자는 아시아 대륙의 서쪽 끝과 동쪽 끝에서 생겨난 격언들을 마음에 담고 살고 있다.
아시아 서쪽 끝에서 태어난 격언은 '신약성경' 중 '요한복음'의 한 대목이다.
여기에는 예수가 부활했을 때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도마라는 제자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창에 찔렸을 때 생긴 자국들을 보고 만져야
예수의 부활을 믿을 수 있겠다고 했다.
예수는 도마를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고,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이 복 받을 것이라 말했다.
인도에서 태어났다가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간 달마 대사도 비슷한 말을 했다.
"나의 가르침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것이며, 눈에 보이는 형태로는 전해지지 않는다(以心傳心, 不立文字)"는
'달마대사혈맥론'의 유명한 대목이다.
그러나 필자는 보지 않고도 믿을 정도로 정신력이 높지 못하다.
그래서 아시아 동쪽 끝에서 탄생한 또 하나의 격언에서 위안을 얻는다.
"비록 좋은 것이라도 증거가 없으면 믿음이 생기지 않고, 믿음이 생기지 않으면 백성이 따르지 않는다
(上焉者, 雖善無徵, 無徵不信, 不信民弗從)"는 '중용'의 구절이다.
사진이 다 말해 주었다 : 1968-2016 : 전민조 사진선집
전민조 [지음]/ 눈빛/ 2016/ 511 p
668-ㅈ278ㅅ/ [강서]2층 인문사회자연과학실
그렇다. 필자 같은 서민은 증거가 눈에 보여야 간신히 믿을 수 있다.
얼마 전에 출간한 '서울선언'(열린책들)이라는 서울 답사기에도, 서울 곳곳의 사진을 최대한 많이
실으려 애썼다. 필자의 책을 읽은 분들이 서울 곳곳에 대한 본인들의 추억을 회상하면서
이런 말씀들을 하신다. "비록 사진은 찍어둔 것이 없지만 그곳에 대한 기억은 생생하다"고.
덕력이 높은 사람들은 사진 없이도 그분들의 기억을 이심전심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필자는 그분들이 사진을 찍어두지 않은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사진이 다 말해 주었다: 전민조 사진선집'(눈빛)에는 1979년의 부마사태 당시 찍은 사진 한 장,
그리고 다음과 같은 설명이 실려 있다. "공수부대 병사들은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기만 해도 무조건 달려들어
방망이로 때리고 발길로 짓밟았다. 광란의 현장을 눈으로만 보며 필름에 담지 못하니 너무 답답했다."
전민조 선생은 강제 진압의 바로 그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지 못한 것을 자책하지만, 필자에게는 그 직전의
부산 상황을 전해주는 이 사진 한 장이 소중하고, 목숨을 걸고 이 사진을 남긴 선생께 감사의 마음을 품는다.
그리고 필자 또한 오늘의 서울과 한국에 대한 증거를 남기기 위해 스마트폰 카메라를 켜고 서울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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