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일경제 2015년 03월 30일)
[신정근 성균관대 유학대학장 / 일러스트 : 정윤정]
소비자 선택을 기다리는 상품은 기성제품과 달라야만 살아남는다.
스티브 잡스가 IT 분야를 개척하고 업그레이드된 아이폰과 아이패드 같은 신상품을 내놓으니
소비자들이 줄을 서서라도 물건을 사려고 했다. 냉장고, 세탁기, TV 같은 가전제품은 더 이상
새로운 물건은 아니지만 기능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제품으로 소비자 선택을 유도한다.
음식점도 차별화된 메뉴로 승부를 걸 때 찾는 사람이 많다.
이처럼 산업과 서비스업은 ‘남과 달라야 한다’는 사고가 기본으로 깔려 있다.
사상 분야도 이전과 같은 소리가 아닌, 다른 소리를 내야 철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똑같은 말을 하는 사람을 주시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전과 다르고 남과 같지 않다고 해서 무조건 환영을 받는 것은 아니다.
다르기만 할 게 아니라 논리를 갖추고 근거도 제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름으로 인해 한때 사람들 주목을 받더라도 시간의 검증에 의해 철학사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다.
묵자(墨子)의 사상에는, 춘추전국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다른 사상가와 공유하는 측면도 있고 그만의 독특한 주장도
뒤섞여 있다. 이 같은 현상은 묵자에게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공자나 노자 같은 널리 알려진 인물에게도 공통으로 나타난다.
묵자의 책을 펼치면 첫 번째로 인재를 가까이 하라는 ‘친사(親士)’ 편이 나오고 두 번째로 ‘수신(修身)’ 편이 나온다.
이 두 편을 읽어보면 묵자는 시대와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지도자가 지녀야 할 덕목과 관련해서
공자와 비슷한 관점을 보이고 있다.
주(周)나라 천자가 정치적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할 때 공동체는 천자-제후-경대부(卿大夫)-사(士)로 이어지는 계급적 질서에
의해 유지됐다. 오늘날 대통령제 정부에서 대통령-장관-비서-도지사-시장·군수로 직무가 이어지고,
기업에서 회장-사장-전무-상무-부장-과장-대리-사원의 조직으로 업무가 추진되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약육강식이 진행되는 와중에 천자 중심의 질서가 무너지고 개별 제후국이 독립국가로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이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오늘날 기업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망하거나 인수합병되는 일이 생겨나는 것과 닮았다.
강한 나라가 등장하면 새로 점령한 지역에서 행정 업무를 맡고 세금을 관리하며 치안을 유지하는 실무자가 많이 필요하게 된다.
이때는 고위 관료보다도 실무를 탁월하게 처리하는 전문가가 환영받는다. 그 결과 기존에는 지배집단의 최하층에서 명령과
지시에 따라 제한된 업무를 하던 ‘사(士)’가 이제 특정 지역과 업무를 추진하는 재량권을 갖게 됐다.
천자의 주나라 중심 질서에서 개별 국가가 경쟁하던 춘추전국시대로 넘어오며 ‘사’는 사회적으로 환영을 받으면서도 실제로
가장 많이 성장한 계층이었다. 그들은 당시 시대의 총아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논어’나 ‘묵자’를 읽으면 정치 지도자들이 ‘사’를 존중하라는 공통된 목소리를 만날 수 있다.
‘친사’는 오늘날의 말로 하면 대학의 창의 인재, 기업의 인재 경영과 같이 “인재를 키우라!”라는 요구와 통한다.
묵자의 전제는 이렇다.
“국정을 맡을 수 있는 인재를 찾아 옆에 두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것이다. 뛰어난 인물을 보고서도 서둘러 기용하지 않으면
그들도 군주를 홀대할 것이다. 뛰어난 인물을 홀대하고 인재를 잊고서 나라를 보존할 수 있었던 왕은 일찍이 없었다
(緩賢忘士, 而能以其國存者, 未曾有也).” (‘친사’)
묵자는 정치 공동체의 운명이 인재와 뛰어난 인물을 활용하는 데 달려 있다고 봤다.
정치 분야를 비롯해 경제, 스포츠, 학계 모두 뛰어난 인물을 급하게 쓰고 인재를 가까이하는 급현친사(急賢親士)에
신경 쓰지 않고 뛰어난 인물을 홀대하며 인재를 잊어버리는 완현망사(緩賢忘士)에 빠져 있지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이처럼 묵자는 시대의 문제를 헤쳐 나갈 뛰어난 인물과 인재가 있는데도 그들이 기회를 얻지 못해서 공동체가
위기 상황에 빠져 있는 것을 누구보다도 안타까워했다. 인재를 널리 구할 생각을 하지 않고 바로 코앞에 있는 사람만을
찾으면서 “인재가 없다” “사람이 없다”고 볼멘소리를 한다면, ‘현안을 해결하지 못해 무능하다’는 소리를 들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해 꽉 막혀 있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두 번째 ‘수신’ 편에서 묵자는 서서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군자가 전쟁을 할 때 진법의 운용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용기가 근본이고, 상례(喪禮)를 치를 때
예법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슬픔이 근본이고, 사(士)가 학문을 배워야 한다고 하더라도 실천이 근본이다
(君子, 戰雖有陳, 而勇爲本焉. 喪雖有禮, 而哀爲本焉. 士雖有學, 而行爲本焉).”
전쟁은 많은 병사를 하나의 몸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여야 전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
“돌격 앞으로!”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장병이 제각각 움직인다면 병사가 많아도 전투 역량이 크다고 할 수 없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평소 진법(陣法)을 갈고닦아야 한다. 진법은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鶴翼陣)’처럼 병사를
부대와 임무별로 배치하고 작전에 따라 병사를 한 몸처럼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이다.
병사들이 아무리 진법을 숙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적을 만나 겁을 집어먹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적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가 없다면 진법은 무용지물이 된다.
상례는 죽은 자를 다른 세계로 보내는 절차다.
상례에 비싼 물건을 준비하고 화려한 장식을 갖추면 다른 사람이 보기에 좋다.
하지만 상례를 치를 때 상주나 가족들이 죽은 자를 위해 슬퍼하지 않는다면 상례의 본령을 잃은 것이다.
이렇게 묵자는 전쟁과 상례의 본령을 말하면서 초점을 학문으로 옮기고 있다. 인재는 당연히 학문을 갈고닦아야 한다.
하지만 그 학문은 ‘학문을 위한 학문’이 돼서는 안 된다.
학문은 반드시 배운 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을 본령으로 삼아야 한다.
즉 묵자는 학문이 삶에서 ‘살아 있는 학문’이 되려면 반드시 ‘실천하는 학문’이 돼야 한다는 방향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사실 묵자 사상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묵자는 침략 전쟁을 반대했다.
그는 “침략 전쟁을 반대한다”는 주장만 한 것이 아니라 군사 집단을 조직해 실제로 침략을 당하는 나라를
군사적으로 돕는 용병 역할을 했다. 이처럼 묵자는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자기 사상의 요체로 삼았다.
사실 이런 특성은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묵자 사상의 독특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는 부당한 침략 전쟁을 응징하기 위해 연합군을 결성하자고 주장하는 정도에 그쳤다.
노자는 전쟁이 사람을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만들고 사회를 황폐하게 만드는지 고발하는 목소리를 높였을 뿐이다.
세 번째 ‘소염(所染)’ 편에 이르면 묵자는 일상의 경험을 통해 이제까지 누구도 내놓지 않았던 환경결정론을 주장했다.
묵자는 옷감을 염색하는 광경을 눈여겨본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옷감을 파란 물감에 물들이면 파랗게 되고, 노란 물감에 물들이면 노랗게 된다.
넣는 물감이 바뀌면 옷감의 색깔도 다르게 된다.
옷감을 다섯 차례 물감의 통에 넣으니 마침내 다섯 가지 색깔이 나왔다.
따라서 염색은 신중하지 않을 수가 없다
(染於蒼則蒼, 染於黃則黃. 所入者變, 其色亦變. 五入畢, 則爲五色. 故染不可不愼也).”
아이가 염색 광경을 봤더라면 신기하다 생각했을 것이다.
묵자는 아이가 아니라 어른의 눈으로 염색 과정을 지켜보면서 인문학적 사고를 했다.
그는 하얀색의 천이 어떤 염색 물통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는 것을 보고 그것을 국가 운영으로 옮겨가 생각했다.
군주가 현신(賢臣)을 만나면 명군(明君)이 될 것이고 간신을 만나면 암군(暗君)이 될 것이다.
현신은 군주가 나쁜 길로 가면 내버려두지 않고 올바른 길로 견인하려 하는 반면 간신은 올바른 길을 가려는
군주마저 나쁜 길로 유혹하기 때문이다.
묵자는 염색을 염색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인문학적 상상력을 펼치고 있다.
이것은 그의 관찰력이 뛰어나다는 것만이 아니라 사고의 연상 능력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묵자는 사(士)라는 인재의 가치를 높이 친다는 점에서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와 같은 목소리를 내면서도,
실천적 학문과 환경결정론처럼 자기만의 목소리를 크게 내고 있기도 하다.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묵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만하다. 특히 창의적인 인재를 찾는 소리가 드높은 요즘,
시대를 이끌 인재를 키우고자 했던 묵자의 이야기는 더욱더 관심을 끌 만하다.
[신정근의 동양철학 톺아보기] 묵자(墨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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