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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역 현상'/ 여성의 敵은 남성이 아니라 '남성 중심주의'

바람아님 2018. 7. 10. 05:50


[만물상] '혜화역 현상'


(조선일보 2018.07.10 김기철 논설위원)


"딸이 페미니즘 카페에 가입해 혜화역 집회가 열릴 때마다 간대요. 말 한번 잘못하면 찍혀요."

며칠 전 만난 기업체 임원은 "요즘 집에서 발언의 자유가 없다"고 했다. 엄살로만 들리지 않았다.

20대 딸을 둔 50대 가장이 '혜화역 현상'을 모르면 자녀와 얘기를 나누기도 힘들다고 한다.

두 달 전 1만2000명으로 시작한 혜화역 집회가 지난 6일엔 주최 측 추산 6만명(경찰 추산 1만9000명)으로 불어났다.

참가자 대다수는 20~30대 여성이다. 


▶혜화역 집회는 여성 대상 몰래카메라 범죄 근절을 내걸고 시작했다.

그러다 직장과 가정·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불이익을 성토하는 자리로 확대되고 있다.

지금의 2030 여성은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또래 남성과 대등하게 경쟁해온 세대다.

이들이 사회에 진출해 맞닥뜨리는 차별을 참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만물상] '혜화역 현상'


▶2030 여성들은 사이버 논쟁에서도 물러서지 않는다.

'한남충'(한국 남자와 벌레를 결합) '꽁치남'(돈 안 쓰는 치졸한 남자)은 애교에 속한다.

'숨쉴한'(남자는 숨 쉴 때마다 한 번씩 맞아야 한다) '소추민국'(성기 크기가 작은 남자가 모여 있는 나라) 같은 표현도

예사다. 남성들이 쓰는 여성혐오 표현을 똑같이 되받아치는 식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홍익대 누드모델 몰카사건에 대해 "편파 수사는 아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게

이들을 자극했다. 지난주 집회 참석자들은 문 대통령을 향해 "재기해"라고 외쳤다.

'재기해'는 여성들이 한국 남성들을 비판할 때 "자살하라"는 의미로 쓰는 말이다.

한강에 뛰어내려 숨진 남성연대 고(故) 성재기 대표의 이름에서 따왔다.

혜화역 집회를 찾은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이 "생생한 목소리를 잊지 않겠다"는 글을 올렸다가

이번에는 문 대통령 지지자들을 자극했다. "대통령을 모독하는 극렬시위에 동조했다"며 정 장관을 해임하라는

청와대 국민 청원에 4만 명 넘게 몰렸다. 대부분 남성 지지자들일 것이라고 한다. 


▶현 정부 지지층으로 알려진 2030 여성들이 대통령을 공격하고 나선 것은 이례적이다.

그만큼 이 문제가 민감하고 갈등의 수위가 높다.

젊은 여성들은 사회에 남아 있는 성차별에 분노하고 몰래카메라 불안에 시달린다.

젊은 남성들은 여성들 때문에 자신들이 역피해를 당하고 있다고 분노한다. 남북, 동서, 계층, 연령 등

우리 사회 갈등 전선에 '남녀'가 빠질 수 없는 단계로 가고 있다.

모두가 머리를 맞대야 할 일이다.  





[인문의 향연] 여성의 敵은 남성이 아니라 '남성 중심주의'


(조선일보 2018.07.10 권지예 소설가)


戰雲 감도는 여성 시위 보면서 '南北 전쟁' 대신 '男女 전쟁' 연상
페미니즘 근본은 차이 인정하되 남녀 차별을 타파하자는 것
극한 치닫는 혐오 극복하고 서로에게 귀 기울이는 대화를


권지예 소설가권지예 소설가


1980년대 초반, 대학 졸업 후, 나는 서울 시내의 한 공립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어느 날,

교무실이 떠들썩했다. "잡았대요!" "걔?" 여선생들이 눈짓을 주고받았다. 한 남학생이 학생주임에게

혼나고 있었다. 교실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창백한 안색의 몸집 작은 그 아이. 변성기도 오지 않은

여린 목소리로 몸이 아프다며 가끔 양호실에 가서 쉬던 아이였다. 설마?!

그 아이의 병은, 아니 죄(罪)는, 관음증이었다. 그 아이는 양호실에 갔던 게 아니라, 여교사 화장실에

숨어들었던 것이다. 범행 도구인 거울이 학생주임의 책상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현장 검증을 하러 여교사 화장실에

가보니 눈여겨보지 않았던 나무 칸막이에서 구멍이 발견되었다.


여교사는 성(性)에 호기심이 많은 사춘기 남학생들의 은밀한 성추행 대상이었다. 몰카(몰래 카메라) 도 없던 그 시절,

교실에서 거울 하나만 있으면 여교사들의 치마 안 '속사정'을 애인이나 남편보다 제자들이 더 잘 알았다.


사실 당시 여교사들 사이에서는 꼭 잡고 싶은 범인이 있었다. '걔'. 관음증 소년도 '걔'는 아니었다.

젊은 여교사들에게 걸려오는 얼굴 없는 변성기 소년의 전화는 거의 테러였다.

짐승처럼 거친 숨소리로 시작해서 입에 담지 못할 상스러운 성행위 묘사와 욕설은 끔찍했다. 잡아 볼 테면 잡아봐!

거의 2년간, 소년은 큰소리쳤고 결국 그는 잡히지 않았다. 그런 전화를 받고 교단에 서면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걔'가

사춘기 소년 60명 속에 숨어 있다는 느낌에 발가벗겨진 듯한 수치심과 자괴감을 느꼈다.

교단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교사면 뭐 하나. 여자는 아무리 지위가 높건 지적(知的)으로 우세하건 성적으로는

남자들의 밥이구나. 심지어 어린 십 대의 제자들한테까지도.


갑자기 옛날 기억이 떠오른 건, 지난 토요일인 7일 서울 혜화동에서 벌어진 여성들 시위의 발단이 홍익대 누드모델

몰카 사건이기 때문이다. 세월은 흘러 거울은 스마트한 몰카로 진화했다.

이 집회는, 피의자인 여성이 구속되면서 '남성이 피해자인 경우에만 경찰이 적극 수사에 나선다'는 편파 수사 주장과 함께

기획되었는데, 이날은 6만 명이나 모였다고 한다.


[인문의 향연] 여성의 敵은 남성이 아니라 '남성 중심주의'
/일러스트=이철원


당연히 불법 촬영은 성차별 없이 근절해야 한다. 그동안 억눌려온 여성들의 불평등한 성차별과 집회의 취지에는

여성이라면 깊이 공감하리라. 그런데 페미니즘의 성격을 띤 집회에 분노를 넘어 위험한 전운(戰雲)이 감도는 건 왜일까.

남북 전쟁이 물러가는 대신 남녀 전쟁이 일어나려는 걸까.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소설이 페미니즘의 의식을 점화하는 듯했지만, 언제부턴가 '메갈'이니

'워마드'니 '한남충'이니 '남혐'이니 '여혐'이니 남녀 갈등이 심상치 않았다.

페미니즘의 근본은 남녀 간의 차이는 인정하되 차별은 타파하자는 것. 극혐의 남녀 대립 구도로 서로를 적(敵)으로

여기면 성차별은 영원히 끝낼 수 없다. 남자와 여자는 상호 보완하는 존재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저자 벨 훅스는 미국의 페미니즘이 대중화되는 과정에서, 성차별에 저항해서 일어났던

페미니스트들이 남성을 혐오하고 여성 자신의 성차별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면서 겪은 시행착오를 진솔하게 이야기한다.

적은 남성이 아니라 남성 중심주의이며, 새로운 길잡이로 소년과 남성을 보듬어 함께할 '페미니즘 남성성'을 고민하고

제시해야 할 때라고 본다.

"선구적인 페미니즘은 우리에게 미래를 향한 희망을 준다. 페미니즘 사고는 상호관계와 상호의존의 윤리를 강조함으로써

우리에게 불평등이 초래한 결과를 바꾸고 동시에 지배를 종식할 방법을 제안한다"고 했다.


사실 가부장제에서 성차별을 당해도 그저 제 인생 안에서 혼자 각개전투하며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을 걸었던

'82년생 김지영'의 엄마 세대는 여성들의 목소리와 연대가 든든하고 반갑다. 그런데 정작 이 목소리는 누가 들어야 하는가.

세상의 반(半)인 남자를 바꾸려면 남성들의 공감과 이해가 필요하다. 어쩌겠는가.

멸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함께 사는 남녀평등의 세상을 꿈꾼다면.

그러니 남성과 여성들이여, 지혜롭게 대화하자. 미워도 다시 한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