其他/송호근칼럼

[송호근 칼럼] 훈민정음의 나라

바람아님 2018. 10. 17. 08:16


중앙일보 2018.10.16. 00:14


세종, 백성들 인격체로 소생하게
문자를 내려 인식 혁명의 물꼬 터
훈민, 즉 교육이 중추인 한국에서
후손 키워내야 할 교육 수장 고갈
개혁은커녕 위원회부터 만들어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
한글 반포 1446년, 올해로 572돌을 맞았다. 만조백관의 항변과 명(明)의 눈치를 살피느라 창제 3년 뒤 세종이 결단을 내렸다. 어린 백성이 문자를 갖게 됐다. 한글 572년의 장구한 역사에서 최고의 문장은 단연 두 개다. 세종의 [훈민정음] ‘서문’, 전봉준의 [무장포고문]. 한양 진격을 결의한 농민군의 절박한 ‘내면(內面)’을 담아낸 혈서가 포고문이고, 자신이 감지한 세상 이치를 표현해 보라는 위민(爲民)의 성은이 문자로 내려진 게 서문이다. ‘서문’엔 임금과 백성의 내면이 교차한다. 전율이다.


‘나랏말씀이 중국에 달아/

/

어린 백성이 이르고자 할 때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실어 펴지 못하는 이 하니라/

이를 위하여 어여삐 여겨/

스물여덟 자를 맹가노니….’


세종이 가엾은 백성에게 하사한 이 스물여덟 자는 전환이 무궁하여 세상의 모든 소리를 능히 담아낼 수 있다. 대제학 정인지가 ‘해례본’에 그리 썼다. ‘바람 소리, 학 울음, 닭 홰치는 소리, 개 짖는 소리라도 이 글자로 적을 수 있다’고. 미물의 소리, ‘개골개골’ ‘꽥꽥’도 담아낸다. 그러니 마음에 깃드는 생각과 감성을 왜 표현하지 못하겠는가.


내면의 욕망을 퍼 올리는 문자로는 한글이 한자보다 월등했다. 아녀자의 글로 치부됐던 한글을 사대부들이 종종 애용했던 이유다. 해남 앞바다를 노닐던 고산 윤선도는 취기에 번개처럼 떠오른 시상(詩想)을 국문으로 읊조렸는데 조선 최고의 가사 문학이 잉태됐다. 송강 정철은 아예 한글로 취흥을 읊었다. ‘한잔 먹새 그려 또 한잔 먹새 그려’라고. 이걸 한시(漢詩)로 ‘일배복일배(一杯復一杯)’라 쓰면 취흥이 깨진다. 감성과 문자가 어긋난다.


백성들이 주체적 인격체로 소생하기를 원했던 세종은 언문일치의 문자를 내려 인식 혁명의 물꼬를 텄다. 문자는 내면적 자아를 발견하고 생성하는 기호(記號)다. 만들어진 자아는 허구, 진정 ‘자신을 얘기하라’고 외치는 방탄소년단은, 따지고 보면 세종의 진실한 후예인 셈이다.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은 내면을 발견하라는 말과 같다. 기성세대에게 거부의 말 펀치를 날리는 BTS의 절창에 “쩔어!”를 떼창하는 ‘Bomb’ 해외 팬들이 어찌 그 말뜻을 알겠는가. 그럼에도 그 발음에 젖어 드는 젊은 내면의 저항심을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송호근칼럼
‘훈민’의 요즘 말은 교육. 대한제국이 지·덕·체 배양으로 집약한 ‘교육입국조서’(1895)를 공포한 이래 교육은 국가로 이관됐다. 일제의 황민교육 36년을 지우면, 교육은 국가의 중추로 자리 잡았고, 빈곤 수렁을 탈출해 선진국 대열로 나서게 한 성장 동력이었다. 그런데 21세기도 18년이 경과한 지금, 훈민의 수장인 교육부 장관은 젊은이들의 내면에 잠재된 재능·열정·정념·취향·욕망에 기(氣)와 형(形)을 불어넣기는커녕, 대중적 트렌드와 인기 영합에 더 골몰하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고교 무상교육은 숙원사업이니 그렇다 쳐도, 유치원과 초등학교 영어수업 허용 여부가 신임 교육부 장관이 다급하게 발성해야 할 세기적 중대 사안인지는 모르겠다.

교육부도 규제로 먹고사는 판에 국가교육위원회라는 옥상옥을 설치해 패기 발랄한 우리 젊은이들을 또 어떤 혼란에 몰아넣으려 하는가. 일산에서 성장한 청년은 세계 무대에서 ‘내면의 발견’을 외치고 있는데, 당 대표 시절부터 대통령 최측근이었던 ‘일산 아지매’는 불발 청문회를 수습하려는 청와대의 다급한 시그널을 복기하고 있었을 뿐이다.


사실 청와대 교육라인에 전문가는 없다. 묘안도 없다. 김수현 사회수석은 집값 잡는 전문가, 이광호 교육비서관은 정규교육을 벗어난 대안학교 교장 출신이다. 대찬 개혁가로 알려진 김상곤 교육감에게 획기적인 대책을 주문했으나 오히려 풀어야 할 숙제를 산더미처럼 남겨 놓고 허망한 세월만 보냈다. 대학 총장 출신을 영입해도 혁신적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게 교육 영역이다. 이해집단이 죽기 살기로 충돌하기에 한쪽을 막으면 다른 쪽이 터진다.


유은혜 신임 장관은 꾀를 내 위원회 정치를 끌어들였다. 유 장관의 희망과는 달리 국가교육위원회가 초정권적 상시기구가 되리라 믿는 사람은 없다. ‘위원회 정치’는 책임회피의 단단한 방패였다. 미래교육위원회든, 국가교육위원회든, 개혁 어젠다에 모든 시간과 열정을 쏟는 명망가는 없다. 현실을 개탄하고, 옳은 얘기만 골라 하고, 대책 수립은 전문위원회에 일임하고, 회의를 파한다. 춤추는 회의가 따로 없다.


훈민정음의 나라에서 후손들의 내면을 소중히 가꿀 교육수장은 고갈됐다. 21세기 융합문명시대, 훈민정신까지는 아니더라도 재기 넘치는 젊은이들의 내면을 숙성하고 발화할 장기 대안을 고심하는 정권은 어디 있는가? 장관 청문회는 난장(亂場)이었다. 미래동력 같은 절박한 담론이 사라진 공간에 장관 지명자의 헤픈 웃음만 멤돌았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