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18.10.16. 00:14
문자를 내려 인식 혁명의 물꼬 터
훈민, 즉 교육이 중추인 한국에서
후손 키워내야 할 교육 수장 고갈
개혁은커녕 위원회부터 만들어
‘나랏말씀이 중국에 달아/
…/
어린 백성이 이르고자 할 때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실어 펴지 못하는 이 하니라/
이를 위하여 어여삐 여겨/
스물여덟 자를 맹가노니….’
세종이 가엾은 백성에게 하사한 이 스물여덟 자는 전환이 무궁하여 세상의 모든 소리를 능히 담아낼 수 있다. 대제학 정인지가 ‘해례본’에 그리 썼다. ‘바람 소리, 학 울음, 닭 홰치는 소리, 개 짖는 소리라도 이 글자로 적을 수 있다’고. 미물의 소리, ‘개골개골’ ‘꽥꽥’도 담아낸다. 그러니 마음에 깃드는 생각과 감성을 왜 표현하지 못하겠는가.
내면의 욕망을 퍼 올리는 문자로는 한글이 한자보다 월등했다. 아녀자의 글로 치부됐던 한글을 사대부들이 종종 애용했던 이유다. 해남 앞바다를 노닐던 고산 윤선도는 취기에 번개처럼 떠오른 시상(詩想)을 국문으로 읊조렸는데 조선 최고의 가사 문학이 잉태됐다. 송강 정철은 아예 한글로 취흥을 읊었다. ‘한잔 먹새 그려 또 한잔 먹새 그려’라고. 이걸 한시(漢詩)로 ‘일배복일배(一杯復一杯)’라 쓰면 취흥이 깨진다. 감성과 문자가 어긋난다.
백성들이 주체적 인격체로 소생하기를 원했던 세종은 언문일치의 문자를 내려 인식 혁명의 물꼬를 텄다. 문자는 내면적 자아를 발견하고 생성하는 기호(記號)다. 만들어진 자아는 허구, 진정 ‘자신을 얘기하라’고 외치는 방탄소년단은, 따지고 보면 세종의 진실한 후예인 셈이다.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은 내면을 발견하라는 말과 같다. 기성세대에게 거부의 말 펀치를 날리는 BTS의 절창에 “쩔어!”를 떼창하는 ‘Bomb’ 해외 팬들이 어찌 그 말뜻을 알겠는가. 그럼에도 그 발음에 젖어 드는 젊은 내면의 저항심을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사실 청와대 교육라인에 전문가는 없다. 묘안도 없다. 김수현 사회수석은 집값 잡는 전문가, 이광호 교육비서관은 정규교육을 벗어난 대안학교 교장 출신이다. 대찬 개혁가로 알려진 김상곤 교육감에게 획기적인 대책을 주문했으나 오히려 풀어야 할 숙제를 산더미처럼 남겨 놓고 허망한 세월만 보냈다. 대학 총장 출신을 영입해도 혁신적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게 교육 영역이다. 이해집단이 죽기 살기로 충돌하기에 한쪽을 막으면 다른 쪽이 터진다.
유은혜 신임 장관은 꾀를 내 위원회 정치를 끌어들였다. 유 장관의 희망과는 달리 국가교육위원회가 초정권적 상시기구가 되리라 믿는 사람은 없다. ‘위원회 정치’는 책임회피의 단단한 방패였다. 미래교육위원회든, 국가교육위원회든, 개혁 어젠다에 모든 시간과 열정을 쏟는 명망가는 없다. 현실을 개탄하고, 옳은 얘기만 골라 하고, 대책 수립은 전문위원회에 일임하고, 회의를 파한다. 춤추는 회의가 따로 없다.
훈민정음의 나라에서 후손들의 내면을 소중히 가꿀 교육수장은 고갈됐다. 21세기 융합문명시대, 훈민정신까지는 아니더라도 재기 넘치는 젊은이들의 내면을 숙성하고 발화할 장기 대안을 고심하는 정권은 어디 있는가? 장관 청문회는 난장(亂場)이었다. 미래동력 같은 절박한 담론이 사라진 공간에 장관 지명자의 헤픈 웃음만 멤돌았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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