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일보 2018.12.17 김동성 기자)
죽는 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통계와 역사에 문학과 과학기 버무려진 생의 마지막 풍경) ‘바람직한 죽음은 어떤 죽음일까?’ ‘오늘 우리의 죽음은 얼마나 행복한가?’ 수만 년간 거의 변하지 않았던 죽음의 가장 기본적인 측면(죽는 이유, 장소, 시기, 방식)들이 한 세기, 특히 지난 몇 십 년 만에 너무나 극적으로 달라졌다. 죽음의 생태학, 역학, 경제학을 넘어서서 죽음을 바라보는 정서 자체가 변했다. 의학의 발달은 인간의 수명을 폭발적으로 연장시키고 치명적인 전염병들을 퇴치했으며, 심폐소생술과 뇌전도는 죽음에 대한 시각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바야흐로 현대 의학은 과학의 반열에 올라섰고 그에 힘입어 거대한 의료-산업 복합체를 탄생시키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그런 반면에 이제 사람들은 병원과 요양원에서 죽음을 맞고, 만성질환을 안고 살아가고, 독립성과 존엄성을 상실한 채 연명치료에 의존하고, 막대한 의료비와 길고 힘겨운 병간호에 허덕이고 있다. 저자는 세포에서부터 중환자실, 법정, 사회 제도, 인터넷 세상에 이르기까지 뻗어 있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서 무엇이 환자에게 정말 해로운지, 어떻게 하면 환자를 가장 잘 도울 수 있는지, 환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치료와 임종은 어떤 것인지 끊임없이 묻고 답한다. “생이 끝날 때까지 잘 사는 법”은 무엇일까. 삶의 막바지에 다다라서야 환자들은 ‘설마 내가, 설마 지금’이라는 생각밖에 떠올리지 못한다. 환자의 가족들은 사랑하는 이가 중환자실에 입원해 온갖 장치를 몸에 연결하고서야 비로소 죽음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 의술의 도움을 받아 약이나 새로운 장비로 무장한 채 죽음에 맞서지만 이는 단지 죽음을 지연시키고 죽는 과정을 연장시킬 뿐이다. 죽음이 싸워 이겨야 할 적이라면 우리는 그 적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 나누고 더 잘 알아야 한다. 하지만 “환자의 가족은 삶에 대해 나보다 훨씬 아는 게 많았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너무나 아는 게 없었다” 이것이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이자, 우리 모두와 나누고자 하는 메시지다. 이를 위해 저자는 다년간의 연구와 현장 경험, 환자 및 가족, 의사, 간호사, 학자와 나눈 인터뷰, 풍성한 참고 자료와 사례를 바탕 삼아 의학, 과학, 역사, 종교, 법, 정책과 제도, 통계, 문학 등 방대한 분야를 넘나들며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대한 대화로 우리를 이끈다. 장수와 노화, 집이 아닌 병원과 요양원에서의 죽음, 심폐소생술과 뇌전도가 바꿔놓은 죽음의 정의, 의사와 환자의 권한, 살 권리와 죽을 권리, 신앙과 연명치료, 간호인과 의료대리인, 생전 유서와 안락사, 죽음 긍정 운동과 임종 인터넷 생중계가 때로는 가슴을 흔드는 이야기로, 때로는 냉철한 비판의 목소리로 펼쳐진다. 임종을 눈앞에 둔 환자를 보며 저자는 수없이 묻는다. “무엇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을까?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 그의 삶은 어땠을까? 그의 죽음을 막을 방법이 있었을까? 그리고 이 모두는 저자가 계속 되묻는 한 가지, “한 생명이 겪는 가장 큰 상실이 어떻게 하면 바람직한 것이 될 수 있을까?”로 수렴된다. “생이 끝날 때까지 잘 사는 법”은 무엇일까? 이 책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깊은 성찰로 우리를 안내한다. | ||||
출판사 서평 “생이 끝날 때까지 잘 사는 법”은 무엇일까 환자의 가족들은 사랑하는 이가 중환자실에 입원해 온갖 장치를 몸에 연결하고서야 비로소 죽음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 의술의 도움을 받아 약이나 새로운 장비로 무장한 채 죽음에 맞서지만 이는 단지 죽음을 지연시키고 죽는 과정을 연장시킬 뿐이다. 죽음이 싸워 이겨야 할 적이라면 우리는 그 적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 나누고 더 잘 알아야 한다. 하지만 “환자의 가족은 삶에 대해 나보다 훨씬 아는 게 많았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너무나 아는 게 없었다.” 이것이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이자, 우리 모두와 나누고자 하는 메시지다. 이를 위해 저자는 다년간의 연구와 현장 경험, 환자 및 가족, 의사, 간호사, 학자와 나눈 인터뷰, 풍성한 참고 자료와 사례를 바탕 삼아 의학, 과학, 역사, 종교, 법, 정책과 제도, 통계, 문학 등 방대한 분야를 넘나들며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대한 대화로 우리를 이끈다. 염색체 DNA와 세포에서부터 중환자실, 법정, 의료 현장, 언론, 대중, 인터넷, 세속의 관습과 신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오가는 이 여정 속에서 우리는 오늘날 죽음과 죽어감의 새로운 풍경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장수와 노화, 집이 아닌 병원과 요양원에서의 죽음, 심폐소생술과 뇌전도가 바꿔놓은 죽음의 정의, 의사와 환자의 권한, 살 권리와 죽을 권리, 신앙과 연명치료, 간호인과 의료대리인, 생전 유서와 안락사, 죽음 긍정 운동과 임종 인터넷 생중계가 때로는 가슴을 흔드는 이야기로, 때로는 냉철한 비판의 목소리로 펼쳐진다.
“무엇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을까?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 그의 삶은 어땠을까? 그의 죽음을 막을 방법이 있었을까?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달리 취할 만한 조치가 있었을까?” 그리고 이 모두는 저자가 계속 되묻는 한 가지, “한 생명이 겪는 가장 큰 상실이 어떻게 하면 바람직한 것이 될 수 있을까?”로 수렴된다. “생이 끝날 때까지 잘 사는 법”은 무엇일까? 이 책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깊은 성찰로 우리를 안내한다. 죽음보다 더 끔찍한 연명과 ‘죽을 권리’ 러던 것이 19세기 중반부터 폭발적으로 늘기 시작해 150년 만에 80세로 증가했다. 마취의학, 항생제, 진통제, 예방접종, 외과 수술, 인공호흡, 심폐소생술, 장기이식 등 현대 의학의 눈부신 발전 덕분이었다. 이처럼 수명 연장에서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지만 그 대가 또한 명백하다. 심장질환, 당뇨, 알츠하이머병 등 만성질환을 앓으면서 무기력하게 목숨을 이어가야 하는 햇수가 갈수록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만성질환이 증가하면서 인간의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겪게 되었다. 대부분의 죽음은 이제 더 이상 갑자기 닥치는 재앙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질질 끌면서 서서히 소진해가는 과정이 되었다. 한 논문의 저자들은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했다. “다윈 이후의 시대에는 새로운 생물학적 현상이 생겨났다. 바로 ‘적자생존’이 아니라 ‘가장 부적격한 자의 생존’이다.”
이제 죽음을 앞둔 사람들 대부분이 자기 집에서 내몰리면서 이웃과 지역공동체로부터 유배당한다. 사람들은 노쇠하면 병원 진찰 일정과 입원이 점점 일상을 지배하면서 더욱더 독립성을 잃고 속박당한다. 압도적 다수의 사람들이 집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쪽을 선호하지만, 병간호에 점점 손이 많이 가면 환자들은 마음을 고쳐먹는다. 그리하여 이제 죽음은 가장 무기력한 상태에 처한 채 병원, 요양원, 호스피스 시설 같은 바깥 사회와 격리된 곳에서 맞는 사건이 되어 버렸다.
과학기술 덕분에 복잡한 전문지식을 갖춘 의사들은 매우 오만해졌고, 의료계에는 권위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정서가 판을 쳤다. 1975년 이런 부당한 관행을 전면적으로 변화시킨 ‘캐런 앤 퀸런 사건’이 일어났다. 스물한 살의 여성 캐런은 호흡이 멈춰 병원으로 실려 갔다. 몇 달 만에 그녀는 뼈만 남은 앙상한 몸으로 의식 불명 상태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병실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부모는 딸의 호흡기를 그만 떼달라고 요청했지만 의사들이 거부하자 소송을 제기했다. 하급심 고등법원은 의사들 손을 들어주었다. 퀸런 부부는 이에 불복해 항소했다. 항소심 대법원은 다른 문제에서는 하급심과 의견이 같았다. 그러나 ‘환자의 권리’ 문제에서만은 달랐다. 대법원은 아버지의 후견인 지위와 환자의 사생활권을 인정하고 만장일치로 연명치료를 중단하라고 판결 내렸다. 캐런은 인공호흡기를 떼어낸 후 10년이나 더 살다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은 오늘날 ‘죽을 권리’라고 알려진 사회운동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환자가 공식적으로 주치의와 의논하고 ‘소생술 거부’ 지시를 직접 내릴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받아도 소용없을까 봐서가 아니라 어설프게 효과를 발휘할까 봐 두려워서다. 심폐소생술을 받는 환자는 뇌손상을 입을 가능성이 높다. 한 환자는 저자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선생님, 내 심장이 멈추면 그냥 보내주세요. 죽음보다 더 끔찍한 상태도 있습니다.” 더욱 모호해진 생사의 경계와 ‘안락사’ 또는 ‘의사 조력 자살’ 등장했다. 그러나 심장 활동의 정지 여부를 바탕으로 사망을 선고하는 관행은 1960년대에 하버드 위원회의 ‘뇌사’ 기준이 발표된 후 사라졌다. 1967년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생명윤리학자 헨리 비처를 의장으로 발족한 하버드 위원회는 이듬해 “회복 불가능한 혼수상태” “영구히 기능이 정지된 뇌”라는 사망 기준을 제시했다. 뇌사가 일상용어가 되고 그 개념이 세계적으로 확산되었지만 문제점도 속속 드러났다. 예컨대 하버드 위원회의 뇌사 기준 중 척수 반사운동을 보이지 않는다는 설명은 나중에 틀린 것으로 판명되었다. 또 뇌전도계 상으로 아무 반응이 없었는데 뇌 기능이 다시 회복된 환자들처럼 찬물을 끼얹는 사례도 계속 나타났다. 실제로 오늘날 중환자실에는 멀쩡히 건강하게 살다가 갑작스럽게 실려와 죽음의 경계선상에 놓인, 그러나 아직 죽음에는 도달하지 않은 환자로 넘쳐난다. 마침내 죽음을 정확히 정의하게 되었다는 기대와 달리, 현대 의학은 생사의 경계를 오히려 훨씬 더 복잡하고 모호하게 만들었다.
안락사가 훨씬 역사와 전통이 길며,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의사 조력 자살은 환자의 자율권을 강조한다. 바뀌었고 그러다가 오늘날 널리 쓰이는 ‘존엄사’라는 용어가 탄생했다. 현재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등은 안락사를, 독일과 스위스, 일본 등은 의사 조력 자살을 합법화했다. 이에 비해 미국에서는 오리건주를 포함해 다섯 개 주가 의사 조력 자살을 합법화했으나 그 지역에서조차 극소수 환자만 이 법을 활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법적으로 전혀 문제 없는 방법이 흔히 이용되는데 바로 안락사에 가까운 ‘말기 진정제 투여’다. 또 탈수 상태를 유도해 죽음에 이르는 ‘탈수 치사’도 시도되었다. 그렇지만 오늘날 중환자실에서 발생하는 사망 대부분은 환자나 의료대리인의 요청과 의사의 승인에 따른 연명치료 거부나 중단을 통해 발생한다. 가장 새로운 죽음의 풍경, 인터넷 아마 가장 최근에 등장한 가장 새로운 죽음의 풍경일 것이다. 지금도 죽음은 신비에 싸여 있기는 마찬가지지만, 한편에서는 예전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죽음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사람들은 병들고 병이 수그러들고 재발하는 과정을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동영상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인터넷에서 기록하기 시작했다. 저자는 이렇게 강조한다. “사멸의 순간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이들뿐만 아니라 죽음이 코앞에 닥친 이들도 이 대화에 참여하고 있다. 우리가 죽는 방식을 개선하는 데는 어떤 과학적인 혁신보다도 이러한 문화적 변화가 훨씬 도움이 될지 모른다.”
서로를 더욱 인간적으로 대하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유익한 결과를 낳기도 하다. “한 연구에 따르면,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헌혈 같은 이타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가능성이 더 크다.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지닐 가능성이 더 크다. 마지막으로, 짐작과는 정반대로, 죽음을 상기하면 오히려 스트레스가 줄어들고, 스트레스가 적을수록 더 건강하게 오래 산다.” 저자의 말처럼 죽음을 물리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죽음에 대해 서로 죽어라 하고 소통하는” 것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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