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19.01.21. 00:15
미국 실리콘제국의 힘이자 화력
세계 제패의 의욕과 열기가 충만
삼성·SK·현대차·LG 우리 기업
제국의 군사력에 제조창 신세로
정부, 말로만 4차산업혁명 외쳐
101번 하이웨이 좌우로 늘어선 500여개 명문 기업들의 열병식은 말 그대로 장관이다. 세계의 이목은 신문명의 특수 여단인 아마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테슬라에 쏠린다. 인터넷 상거래에서 클라우드 비즈니스로 변신한 아마존(Amazon)은 매출액 200조원을 달성했고, 아이폰의 명가 애플(Apple)은 250조원을 훌쩍 넘겼다. 컴퓨터 시스템의 강자 시스코(Cysco)가 번성 중이고, 인텔(Intel)과 화웨이(Huawei)가 지척이다. 퇴근 때면 인도인, 중국인, 한국인이 백인들과 섞여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일본기업이 더러 보이기는 하지만 제조업체이고, 유럽 기업은 존재감이 없다.
구글(Google)의 도전은 언제나 화제거리다. ‘Project X’, 미지 문명을 실현한다는 야심 찬 기획인데 원칙이 있다. 적어도 인구 10억명의 공통 난제, 인류의 진보에 기여하며, 기발한 아이디어라도 수익을 배제하지는 않는다는 것, 세 가지다. 자율주행차 웨이모(Waymo)가 이렇게 탄생했다. 인간의 실수를 AI가 장착된 자동시스템으로 막는다! 세계 오지에 열기구 인터넷망을 띄운다는 ‘Project Loon’도 그랬다. 인터넷장비를 열기구에 띄워 유용한 정보를 송신한다는 취지다. 남미 산악지대, 아프리카, 동남아 섬 지역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기발한 아이디어였다. 이 인터넷장비를 작동시키는 것은 삼성 반도체 칩이다.
우리는 대체 뭘 했을까? 우리가 창조경제, 혁신경제를 외치는 동안 그들은 제도와 환경을 먼저 만들어냈다. 우리가 청년들을 취업전선에 내몰았다면 그들은 아이디어를 요구했고, 실행방법을 찾았고, 엄청난 보상을 지불했다. 로봇과 애완견이 섞여 다니는 자유분방한 작업장을 그들은 캠퍼스라 부른다. 석박사보다 학사들이 주력이다. 최대 관심사는 역시 AI와 빅데이터, 스타트업과 벤처가 수천 개다. 틈새 아이디어를 포착해 실현하면 인생역전, 대박이다. AI 융합문명을 향한 대박의 꿈을 미국 정부가 지킨다. 전자산업이 국방안보와 직결된다는 명분으로 미국 정부는 최근 중국 푸젠반도체에 무역법 232조를 발동했다. 기술도용 혐의였다.
실리콘제국에는 기업, 과학인력, 정부 간 삼각동맹이 작동한다. 모험적 기업, 열정적 청년 인재들, 기업보호라면 국가 분쟁도 마다치 않는 정부, 이 세 가지가 제국의 힘이고 제국의 영토를 넓히는 막강 화력이다. 이 지역 상위 30개 기업 총매출액이 우리 국민총생산 1800조원을 능가하는 막강 제국을 구축한 힘도 그것이다. 삼성, SK, 현대차, LG, 롯데, 우리가 자랑하는 주력 기업들은 어찌 보면 제국의 막강 군사력에 군마(軍馬)와 병기를 납품하는 제조창이다.
반도체 강국, 최고의 군마를 길러내는 갑마장(甲馬場) 지위라도 지키려면 무엇을 해야 할지 뚜렷한데 현실은 암담하다. 발걸음이 무거울 수밖에. 돈도 힘도 없는 과학기술대학 총장들과 이공대 학장들에게 구조조정은 술자리 넋두리에 불과하고, 이공계 교수들은 제자들 연구비 확보에 능력을 소진하고, 기업은 계급장 질서에 숨이 막힌다. 거기에 말로만 4차 산업혁명을 외치는 정부, 그나마 작은 촌락 같은 판교밸리라도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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