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18.12.11. 00:07
적폐와 통치의 모호한 경계속에
대중환호도 염증으로 바뀌어가
정의와 불의 헷갈리는 환국과
광풍속에 익사한 '선의' 산을 이뤄
좌든 우든 사람 귀한 줄 알아야
공포가 무의식에 깔리면 대중은 자기검열과 사주경계의 등불을 켜고 밀실에 들어앉는다. 과거의 권력자와 지도층 인사가 검찰 조사 끝에 급기야 극단적 방식을 택하는 풍경이 반복되고, 이념적 처단을 강요하는 과격한 외침이 비등할수록 대중심리는 얼어붙는다. 가담과 개입에 따르는 위험부담을 극소화하려는 것이다. 요즘처럼 ‘적폐’와 ‘통치행위’ 사이 간격이 좁아지면 대중은 판단 중지 영역으로 망명한다. 그게 최선의 안전지대인 현실에서 정의개념은 흐려질 수밖에 없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인사 중 국정농단 혐의로 구금되거나 재판에 계류된 사람은 줄잡아 100여 명, 자살로 항변한 사람도 여럿이다. 이재수 전(前)기무사령관이 목숨을 끊었다. 세월호 유가족 사찰 혐의 관련 검찰의 전방위 압박 수사를 견디지 못했다. 국정원 댓글 사건이나 우병우 전(前) 민정수석의 권력남용은 단죄를 받아 마땅한데, 적폐와 통치의 구분이 모호한 경계에서 경찰·검찰·청와대의 삼중 감찰을 받는 사례도 부지기수다. 양승태 대법원 시절, 일부 판사들이 박근혜 정권과 보조를 맞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에도 대법관의 자율 권한과 정치 거래의 경계는 여전히 모호하다. 박근혜 정권과 교감이 있었다 해도 그것은 적폐인가 통치를 받든 행위인가? 2014년 헌재의 정당 위헌판결 때 통합진보당 변론을 맡았던 김선수 변호사가 대법관에 오르는 판국이니 통치와 적폐가 헷갈리는 건 당연하다.
환국은 개혁을, 개혁은 칼바람을 불러왔다. 초기의 대중 환호는 곧 염증으로 바뀐다. 문화전선이 활발해지는 것은 대중이 적폐청산극에 염증을 느낄 때다. 정권과 코드를 맞춘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 수백만 관중이 매료됐다. 경제주권을 넘기고 안도하는 권력집단과 파산에 허덕이는 서민을 극화해 분노의 근거를 확인시켰다. ‘IMF는 지배층과 대기업이 저지른 범죄이자 소득과 고용불평등의 기원’이라는 메시지는 적폐청산에 악전고투하는 현 정권 격려가로 들린다. 끝 장면 자막 ‘금모으기로 모은 돈 22억 달러는 대기업으로 흘러들어갔다.’ 과연 그럴까? 정보와 경험이 천차만별인 세상에서 동의를 구축하기란 쉽지 않다. 농업에서 정보화 사회로 수직상승한 한국에서 정의 개념은 지그재그였다. 정의론의 대가 마이클 샌델(M. Sandel)에게 자문한다면, 여전히 ‘논의해 보라’일 것이다. 미국 연방대법관인 스티븐 브라이어(S. Breyer)가 말한다. “충분한 통찰, 각자의 주장과 결과, 역사와 논점을 제대로 이해하기 전까지는 판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경향신문, 12월 4일자), 정의(正義)의 강(江)은 천천히 흐른다는 뜻이다. 민주화 이후 정권이 휘몰아친 정의의 강은 급류였다. 휩쓸린 사람이 부지기수, 익사한 선의(善意)가 산을 이룬다.
정의는 차라리 주막에 있었다. 학술회의가 끝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었다’. ‘등 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영세기업 소장과 직원이 술잔을 놓고 얘기했다. 부하인 듯한 중년사내가 말했다. “오늘의 정의가 내일의 적폐가 되문 우짤라고요. 광화문이 난장판 아니여, 시방. 민주당, 한국당, 정의당, 이래 떠드는데 정의가 뭔지 당췌 헷갈리서….” 헷갈리는 게 맞다, 그러니 좌파든, 우파든 사람 생명 귀한 줄은 알아야 한다. 그럴 땐 ‘먼 눈으로 술잔의 수위만을 안타깝게 바라볼’ 황지우의 시(詩)를 떠올리는 게 제격이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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