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19.01.07. 00:13
세금 54조원 축낸 고엽제 같았다
소시민들이 십시일반 어렵게 낸
그 돈이 아무 효과 못 내고 증발해
중소기업은 장송곡 틀기 직전인데
그래도 계속 행진, 행진하는 건가
이렇게 진언하는 보좌진이 필요하다. 혹시 틀렸다 해도. 김광두 경제자문위원장은 밀려났을까, 아니면 이렇게 진언하다 지쳐 물러났을까? 팔도에 현지조사단을 파견하면 금시 알 수 있다. 무엇이 진실인지. 1862년 진주민란 당시 안핵사로 파견됐던 박규수는 이렇게 장계를 올렸다. “...흙더미처럼 무너지는 형세가 바로 순식간에 대두할 것입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면 두려워 떨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와대 보좌진들은 이런 걱정을 하고는 있는가? ‘경제 틀을 바꾸고, 논란이 있어도 가겠다’는 대통령의 의지는 좋은데, 만약 팔도 사정이 저렇다면, ‘개혁의 역설’인가, ‘개혁의 부작용’인가? 청와대 보좌진들이 젊은 시절 투신했던 반독재투쟁의 목적은 분명했다. 몸이 으깨지는 부작용, 그걸 견뎠을 텐데 작금의 부작용은 누가 견디고 있는가? 최저임금제와 주 40시간 노동제는 누가 감당하는가? 현 정권이 애지중지하는 자영업자와 하청업체는 직격탄을 맞아 사망 일보 직전이다. 거기에 고용된 하위소득층들도 불안정한 토막 일자리를 찾아 메뚜기 떼가 되었다. ‘인내하고 성숙한 자세로 밀고 나가면 경제 틀이 바뀝니다!’ 바뀌겠지만 그땐 벌써 민초들은 말라죽었을 터.
고용과 소득 모두 결딴내고, 소상공인 사업 접게 만든 건 정책의 어설픈 설계와 실행방식 때문임은 누차 지적했다. 예상된 부작용을 따지지 않고 급하게 서둘렀던 탓이다. 그 정책은 고엽제 같았다. 이론적으론 성장촉진제였겠지만, 실은 탈색제, 탈취제였다. 올봄에는 새싹이 돋을까? 작년에도 기대했는데 기다려달라는 말뿐이었다. 자영업자와 하청업체 직원, 중산층 소시민들이 십시일반 어렵게 낸 세금, 54조원. 그 돈은 아무 효과를 못 내고 결국 증발했다. 이 돈이라면 5000억 원 자본금, 시장가치 5조원 기업을 100개 만든다. 기업당 좋은 일자리 2000개, 총 20만개 일자리를 만들 돈이다.
‘논란이 있더라도’에서 논란의 진원지는 식자(識者)가 아닌 벌판 민초다. 민초에 눈물 흘리던 청와대 보좌진들의 결기가 빚어낸 한숨이다. 을(乙)과 병(丙)의 싸움, 병의 을에 대한 증오가 올해도 타오를 거다. 정부가 싸울 경제 갑(甲)은 어디로 갔는가? 노조에 끌려다니고, 단순이론과 낡은 신념에 집착하는 정말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들이 경제사령부에 가득하다. 경제 틀을 바꾸기 전에 이들을 통째로 바꾸지 않으면 오히려 정권이 바뀐다. 다시 촛불광장으로 가는 비상구가 열린다. 중소기업은 ‘활력!’이 아니라 장송곡 틀기 직전, 그래도 계속 행진, 행진하는 건가?
"2016년 가을에 광장에 나가 촛불을 켰습니다. 박근혜 정권이 탈취한 주권을 찾으러 갔지요. 시민들의 간절한 표정, 굉음을 울리며 광장에 돌아온 주권을 보고 환호했습니다. ‘촛불처럼 바꿔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촛불로 ‘바뀔’ 위험이 쿵쾅거리며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촛불광장으로 가는 비상구가 열리고 있는 현실, 이걸 꼭 이렇게 진언해야 하나요? 예법을 어겼습니다만, 올 8월에 민초들이 기적처럼 살아난다면 광화문 광장에 꿇어앉아 격한 반성문 쓰겠습니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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