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13.02.12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설을 잘 쇠셨는지, 오랜만에 친인척들을 만나 화기애애한 기억을 갖고 돌아오셨을 터,
이참에 오백 년 전통에 항거한 무용담 한 토막을 들려드리고 싶다.
필자가 조상숭배의 나라에서 ‘조상도 모르는 놈!’이 된 사연을 말이다.
부친은 이 말을 달고 사셨다.
추로지향(鄒魯之鄕)인 안동과 자웅을 겨루느라 제례를 과도하게 발전시킨 영주(榮州) 출신이라
더욱 그랬다. 부친은 호를 아예 효응(孝應)이라 지으셨다. 효로 조상 은덕에 응하면서 사시는 신조는 탓할 바 아니나
그 실행 의무가 베이비부머인 장남에게 온통 실린다는 게 문제였다.
유교 문화의 막내 세대, 그것도 충효사상에 세뇌된 베이비부머에게 부모의 신념과 조상숭배는 종교였다.
그러니 종교혁명을 일으키지 않고는 ‘평화롭고 오롯한 명절’은 존재하지 않았다.
제사는 그냥 넘어가면 양속이고, 따지면 불화다.
오십 줄까지 효응 선생의 신조에 착실히 응하던 중 불경스러운 회의가 들었다.
이 많은 음식, 투여한 노동, 친인척의 출석, 그리고 총총히 흩어진 뒤의 허망함은 도대체 뭐지?
제사 후 느긋하게 음복하시던 효응 선생의 표정과는 달리 장남의 지식창고에는 반란이 싹텄던 거다.
반란은 곧 기획연구로 이어졌는데 제례를 창안한 조선 유교의 비밀을 기어이 밝혀냈다.
그것은 통치 이데올로기의 실행 방식이었다.
성리학을 개국이념으로 택한 조선의 건국 세력은 불교 탄압과 함께 민간의 주술신앙과 음사(淫祀)를 엄격히 금지했다.
소격서를 세워 무당과 무격을 내쫓았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조상과 하늘을 들어앉혔다.
제례(祭禮)와 제천(祭天)이 그것이다. 경복궁 좌측에 종묘를 지어 조상숭배의 기초를 마련하고, 우측에 사직단을 지어
곡식신과 토지신에 길운과 풍년을 빌었다.
조선법전인 『경국대전』에 제사 규칙을 정해 반포했다.
‘6품 이상은 3대 봉사, 7품 이하는 2대, 서민은 부모 제사만 지낸다’.
먹을 게 없던 시절, 빈곤한 서민은 위패에 절하는 것으로 족했고, 제수(祭需)는 형편에 따랐다.
그런데 가문과 문벌의 위세 경쟁이 격화됐던 조선 후기 봉제사는 문중 대사, 가족의 최대 행사로 변질됐다.
1년 20회 정도 제사를 행하지 않으면 양반이 아니었던 당시의 풍조에서
신분 향상을 열망했던 서민들도 제례 경쟁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몇 년 전, 설 제사를 정중하게 지낸 후 필자는 연구결과를 조심스럽게 발표했다.
유교가 종교 기능을 벌써 상실했고, 한말(韓末)을 기준으로 친가, 외가, 처가에 벼슬한 사람이 없는 한족(寒族) 서민이
분명하므로 이제 제사는 무용하다는 주장을 폈다.
조선이 역사에 묻힌 마당에 통치수단인 제례의 의미는 소멸됐음을 부가했다.
주자학 선조 안향 선생을 배향한 소수서원에서 반경 백리 안에서 사셨던 효응 선생의 표정은 곧 험악해졌고,
베이비부머의 반란에 최후통첩을 날렸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 된다!’
그 최후통첩에 결국 무릎을 꿇는 게 오륜(五倫)의 도리였지만 어리석게도 그만 베이비부머의 합리성을 발동하고야 말았다.
‘저의 앎과 지식을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 이쯤 되면 세대 간 전선에는 화염이 인다.
“조상도 모르는 놈들!” 철저한 사전 모의에도 불구하고 이 호통 하나로 자식들은 부모 세대의 성곽으로 투항했고,
장남에게도 얼른 항복하라는 묵언의 신호를 보냈다.
필자는 제사 간소화론으로 타협에 나섰지만 효응 선생은 분노에 치를 떨며 노구를 끌고 귀가했다.
협상은 깨졌다.
필자는 연구결과를 칼럼에 썼다. 며칠이 지나 연구실로 전화가 걸려 왔다.
안동 태생의 70대, 명문대 출신 공무원이었다고 밝힌 노신사의 질문은 이랬다.
“사실 나도 제사를 고민 중인데, 송 교수가 주장한 논리의 역사적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필자는 아주 소상하게 기획연구의 경로를 말했고, ‘예법에 사로잡힌 제례’의 폐지를 주장했다.
온갖 제물을 폐하는 대신 밥, 국, 북어포, 냉수에 술 한잔이면 족하다고 말했다.
“음-.” 저쪽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지자를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할 요량으로 나는 부가 설명에 들어갔다.
동학 창시자인 최제우는 간소화를 주장해 네발짐승의 고기를 금하고, 국, 밥, 나물 정도만 권했다.
2대 교주 최시형은 아예 청수(淸水)만 올리도록 했고, 무엇보다 마음가짐을 중시했다는 점을 말이다.
조금 뜸을 들인 뒤 그가 투항했다. “나도 그렇게 할랍니다!”
‘평화롭고 오롯한 명절’은 결렬된 협상의 작은 전리품이다. 휴전협정이 체결되지 않아 여전히 불안한 평화다.
그러니 ‘조상도 모르는 놈!’을 되뇌고 계실 효응 선생이 걸린다.
설은 잘 쇠셨는지, 일가 친지들과 재회의 기쁨을 갖고 돌아오셨는지, 귀성객들이 보낸 고향의 설날도 궁금하긴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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