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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한 장 없어도… 위안부 피해자의 기억은 역사가 된다

바람아님 2019. 2. 3. 17:27

(조선일보 2019.02.02 김태훈 출판전문기자)


실증주의 역사의 한계 지적하며 개인 경험 바탕의 기억에 주목
日 2차 대전 전몰자 300만명 중 절반 넘는 180만명 굶어 죽었지만 야스쿠니선 "장렬히 산화" 참배


'기억 전쟁'기억 전쟁

임지현 지음|휴머니스트|2019.01.28.|300쪽|1만8000원


300만명에 이르는 2차 세계대전 일본군 전몰자에 대한 일본의 '공식적 기억'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장렬히 숨진 전사자'다.

그러나 이런 기억은 전사자 중 절반 넘는 180만명이 태평양 여러 고도(孤島)에서

방치된 채 굶어 죽었다는 사실 앞에서 허물어진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식인과 기아로 인한 비참한 사망을 감추고 국민의 마음에

새겨진 전몰자에 대한 인상을 강화하며 궁극적으로 전범국이라는 죄의식을 기억에서

몰아내기 위한 장치다. 그들은 야스쿠니에서 만들어진 기억을 향해 참배한다.


역사학계에서 탈민족 담론을 주도해온 임지현 서강대 교수가 '기억 활동가'로 변신을

꾀하며 새 책을 냈다. 저자는 문서와 기록을 토대로 하는 실증주의 역사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증언을 통한 기억 연구라는

새 방법론을 제시한다. 문서로 남은 역사 기록은 승리자의 것이며, 실증의 역사가 가해자와 희생자를 뒤집고,

공범자를 지우며 약자의 목소리를 억압한다는 문제의식을 담았다.


지난 세기 세계 곳곳에서 자행된 대량 학살과 식민 지배로 인한 고통을 기억하는 다양한 사례가 제시되지만

우리에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사례가 가장 절실하게 다가온다. 일본 우익은 강제 동원을 기록한 문서가 없다는 점을 들어

위안부 피해의 본질을 왜곡하고 더 나아가 위안부 피해를 기억에서 지웠다.

그런 나라에서 고노 담화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피해 할머니들의 증언을 인정하는 자세 전환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아베 정부가 고노 담화를 검증하겠다고 했을 때 동원한 무기가 '문서를 통한 검증'이었다.

저자는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 동원 개입을 부인하는 이들은 오로지 기억에 의존해 증언할 수밖에 없는 피해자들이

저지르는 실수를 물고 늘어진다고 꼬집는다. 피해 할머니들의 증언을 '혐오스러운 조작' '진실의 왜곡과 날조'라고

공격하는 일본 우익의 행태를 저자는 실증주의의 폭력으로 규정한다.



2016년 8월 29일 서울 남산의 옛 통감관저 터에서 열린‘기억의 터’제막식에 참석한 김복동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지호 기자


기억 조작은 가해자의 전유물이 아니며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를 지우기도 한다.

베냐민 네타냐후 전 이스라엘 총리는 "중동의 이슬람교도들이 히틀러를 사주해 홀로코스트를 일으켰다"며

중동 공범자론을 퍼뜨렸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지배를 정당화하려면 죽은 히틀러와 싸우기보다 눈앞의 아랍인들과 싸워야 한다는 정치적 계산이

자신이 입은 피해마저 왜곡하게 했다.

2차 대전 중 나치에 의해 600만명이 희생됐다고 믿어 온 폴란드의 기억 전쟁엔 위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들은 폴란드 희생자 520만명 중 300만명이 유대인이란 연구 결과가 나오자 이를 배척했다.

'폴란드인이 가장 큰 피해자'란 공식 기억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나치 점령기 폴란드에 숨어 있는 유대인을 사냥하는

슈말초브니치가 활개쳤고, 치안을 담당하는 청색경찰을 운용하는 등 나치의 공범이었던 기억도 숨겼다.

저자는 "도덕적 자기만족을 위해 기억을 왜곡하는 행위야말로 과거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기회를 내던진다는 점에서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기억 전쟁에 대한 성찰은 우리 내부로도 향한다. '한국은 일제의 가장 큰 피해자'라는 기억은 진실한가.

일제를 경험한 말레이인 중엔 일본인보다 더 잔혹했던 조선인 병사들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다.

2006년 '일제하 강제 동원 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조선인 B·C급 전범 83명을 일본의 전쟁 책임 전가에 따른 피해자로

인정한 사실도 비판한다. '조선인은 모두 피해자'라는 논리는 '유대인이므로 모두 죄인'이라는 나치의 반유대주의를

거울에 비친 것과 같다고 본다.


상처는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저자는 우리가 목도한 끔찍한 만행이 인간 본성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경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려면 섣불리 이해하고 화해하기보다 더 나은 기억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베 일본 총리는 "위안부에 대해 사과했으니 더는 거론하지 말라"고 요구하지 말았어야 했다.

우리가 위안부 피해를 기억하려는 것은 일본의 후손에게 책임을 묻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 나라끼리 같은 비극이

반복되는 것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