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경제 2019.06.04. 06:03
정부가 공식 부인하는데도 화폐개혁에 대한 불안감이 수그러들지 않고 금, 달러, 해외부동산으로 돈이 몰리고 있다.
유튜브에는 화폐개혁 확률이 99%라고 장담하며 자신이 제시하는 재테크 방법을 뒤따르라는 선동가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른바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을 통해 1000대1로 '0' 3개를 떼내 미국 달러화와의 교환비율을 1대1.2 정도로 줄인다는 것이다.
이번 말고도 박승 한은 총재 시절인 2004년경 실제로 액면단위를 낮춰보려는 시도가 있었다가 무산된 일이 있었다. 그러면 이번엔 정말로 단행할까?
나는 이주열 한은 총재, 여당 핵심 관계자, 그리고 기재부 고위층 등에게 직접 질문을 해보고 정부여당의 방침을 확인했다.
오래된 일이지만 우리나라에선 1953년과 1962년 두 차례 화폐개혁이 있었다.
원을 환으로 바꿨다가 다시 원으로 갔다가 하면서 10대1로 화폐단위를 바꿨다. 일반인에게는 어려운 용어인 리디노미네이션을 두 번 단행한 역사가 있었던 것이다.
종류는 다르지만 1993년엔 금융실명제를 했고 조금 있다가 부동산실명제를 또 했다.
이런 조치들에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말이 '깜짝쇼'였다. 국민이 전혀 생각도 안 했는데 상상도 못할 뒤통수를 때렸다는 말이다.
이런 일을 자주 당한 국민에게 공통점은 정부를 잘 안 믿는다는 트라우마가 있다.
정부가 뭐라고 해도 언제 뒤통수를 또 맞을지 알 수 없으므로 알아서 미리 대비하라는 루머가 더 잘 먹힌다.
지금 시중에는 화폐개혁론이 광범위하게 퍼지고, 이주열 한은 총재가 "그럴 계획이 꿈에도 없다"는데도 설(說)은 설(說)을 낳으며 퍼져간다.
아니라는데도 안 믿는다. 한국 사회의 신뢰가 그만큼 부족하다는 얘기인데 참 불행한 일이다.
왜 안 믿을까. 문재인 대통령과 경제장관, 청와대 수석 등의 책임이 가장 크다.
시중에선 경제가 비상이라며 아우성인데도 대통령은 "한국 경제는 아주 좋다"고 말한 게 벌써 몇 번인가.
홍남기 부총리, 김수현 청와대 정책수석 등이 대통령에게 좋다고 보고했으니 그럴 것이며 청년실업이 사상 최악인데도 일자리수석은 "상황이 무척 좋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이러니 화폐개혁론은 사실이 아니라 해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화폐가치가 떨어질 테니 금을 사놔라. 부동산에 투자하라며 돈 좀 있는 계층은 아우성이다. 신문사에 전화로 언제 화폐개혁을 하느냐고 묻는다.
글을 더 전개하기 전에 필자가 확인해 본 바로는 "화폐개혁(리디노미네이션)은 이번엔 없다"고 먼저 확인한 다음 풀어나가려 한다.
화폐개혁을 해야 할 당위성은 1달러=1200원이 말해주듯 한국의 돈 가치가 OECD 회원국 가운데 1000단위를 넘어가는 유일한 나라이니 참으로 폼 안 나는 일이다.
경제규모가 커지다 보니 조(兆)를 넘어 경(京)으로 넘어가 큰 숫자에 대한 감이 안 온다는 것이다.
시중 음식점만 가더라도 5만원을 50,-이렇게 000을 떼버리고 이미 현실경제에선 리디노미네이션이 돼 있으니 차제에 시행해버리자는 거다.
이런 몇 가지를 말한 다음 꼭 붙는 게 지하경제가 20%쯤 되는데 화폐개혁으로 양성화하여 세금도 뜯고 하면 일석이조라는 것이다. 좌파 입맛에는 구미가 당기는 얘기다.
한국의 GDP가 약 1800조원이므로 지하경제 20%이면 360조원으로 얼추 연간 정부 예산과 맞먹는 규모인데 이를 공돈이 생기는 것처럼 오도한다.
역설적으로 바로 이 점이 화폐개혁 시 부작용이 너무 크다는 반론의 첫 번째에 해당한다.
돈은 이력을 캐묻는 걸 가장 싫어한다. 그래서 아예 금이나 달러로 바꿔서 결국 햇볕을 쬐지 않게 되는 수단은 널려 있다.
비트코인을 사놔도 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공교롭게도 금, 달러, 비트코인이 모두 오름세다. 환율이 계속 오르리라고 판단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국내 들어와 있는 외국자본이 앉아서 손해보기보단 해외로 도망갈 것이다. 요새 주식시장에서 몇 조원이 빠져나갔느니 하는 말이 그것이다.
그러면 주가가 하락하고 주식보유자들은 손해를 느껴 소비가 위축된다. 이것은 소득주도성장의 정수리를 내리치는 격이다.우리나라는 기름, 식량에 1500억달러를 소비하는데 환율 상승, 즉 원화가치 하락은 더 많은 자본을 투입해야 함을 의미하고 들여오는 기름, 식품류 가격은 상승한다.
인플레다. 그러면 못사는 계층일수록 더욱 생활이 비참해진다. 레미제라블이 따로 없다. 좌파들은 이런 원리를 아는가.
심리가 불안해지면 별별 소동이 다 벌어지는데 지금 한국이 그렇다.
첫째 정부를 못 믿고, 경제주체들이 서로를 못 믿고, 외국인도 한국을 못 믿는다.
리디노미네이션의 장점은 앞에서 열거한 대로 수두룩하게 많다. 그런데 한두 가지 단점이 그런 장점을 몽땅 삼켜버리고도 남는 게 한국의 경제 현실이다.
그러므로 지금 화폐개혁의 타이밍은 아니며 리디노미네이션을 감행한다면 집권당은 차기 선거에서 훨씬 표를 더 많이 잃을 것이다.
사실 27개국이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했다. 일본도 100대1로 단위를 줄여보려고 시도한 일이 있다.
여러 국가가 1000대1로 바꿨고 터키, 짐바브웨같이 1억대1로 바꾼 나라도 있다.
그런데 성공한 사례는 몇 나라 안 된다. 왜냐하면 국민이 원하고 따라줘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국민이 원하는가. 반대 여론이 더 많다. 그러면 못 하는 것이다.
한국의 화폐단위는 원으로 한은법에 규정돼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문재인정부가 전격 벼락작전을 좋아한다 해도 불가능하다. 법을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였다. 가령 브라질은 헤알화를 쓰면서도 신헤알 같은 글자를 하나 더 넣는다.
한국도 단위를 바꾼다면 신(新)원이랄지, 명칭을 바꿔야 한다. 그리고 벼락치기로 내일부터 일주일간 다 바꾼다가 아니다. 2008년 리디노미네이션 법안을 낸 적이 있는데 대략 5~10년이 걸리는 것으로 일정을 잡았다.
그러므로 아무리 하고 싶어도 벼락치기는 없다는 점을 믿어도 된다. 그러므로 유튜버들의 선동은 사기꾼이라고 나는 장담한다.
이원욱 의원(더민주)이 주도한 화폐개혁 세미나에 나온 이인호 서울대 경제학 교수와의 통화에서 매우 의미 있는 얘기를 들어 소개한다.
"화폐의 역사를 다시 보면 1962년 화폐개혁 이후 원화가치는 10분의 1 정도로 떨어졌다. 거의 60년 만에 그 정도면 노멀한 수치라 해도 좋다. 한국 돈은 일본 화폐를 본떠 만들었는데 사실 엔화도 일본 경제력이 세계 3위인데 달러 대비 100대1은 유로화, 파운드화 등에 비하면 좀 위신이 안 서는 편이다. 왜 그렇게 됐을까. 당초 화폐 설계가 잘못됐다. 달러는 그 밑에 100분의 1인 센트(cent) 단위를 둬서 처음엔 센트 위주로 운용하다가 나중 물가가 오르니 달러가 주인공이 된 이중 구조로 돼 있다. 그런데 원이나 엔화는 그런 게 없다. 한국도 옛날엔 원 밑에 전이 있었으나 사라진 게 잘못일 수도 있다."
이번 한국에서 벌어진 화폐개혁 소동을 전 세계가 눈여겨보면서 내면적으로 문재인정부에 큰 물음을 던졌을 것이다.
정부가 부인하는데도 화폐개혁론이 번져나간 것은 한국 국민들이 현 정부를 불신한다는 증거 아닌가.
그렇다면 누가 불신을 키웠으며 그것을 치유할 능력과 의지는 갖고 있는가.
이처럼 불신이 높아질 때 만약 경제나 금융위기가 찾아온다면 수습할 능력이 있는가.
[김세형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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