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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하의 런던이야기] [3] 지도자의 눈물

바람아님 2019. 7. 4. 07:58
조선일보 2019.07.03 03:10

테리사 메이
/EPA 연합뉴스
최근 영국에서 보기 힘든 장면을 보았다. 지도자의 눈물이다. 지난 5월 24일 테리사 메이〈사진〉 총리가 브렉시트 혼란 책임을 지고 사퇴를 발표한 기자회견장. 평소와 달리 기자 질문도 안 받고 바로 10번지 숫자가 적힌 다우닝가 총리 관저 문을 향해 몸을 돌리는 순간 그의 눈은 촉촉이 젖어 있었다. 현직 총리가 눈물을 보인 경우는 2차 대전 중 참상에 여러 번 눈물을 보인 윈스턴 처칠 말고는 전례가 거의 없다. '철의 여인'이라 불렸던 마거릿 대처가 관저를 떠나는 차 안에서 보인 눈물은 이미 총리가 아닌 일반인의 눈물이었다. 메이 총리는 오는 22일 집권 여당인 보수당의 새 대표가 뽑힐 때까지 현직 총리 신분이다.

영국인 자신도 인정하는 특성 중 하나가 'Stiff Upper Lip'이다. '단단히 다문 윗입술'이라는 뜻인데 영국인이 뭔가를 꾹 참고 견딜 때 보여주는 모습이다. 아무리 감정이 북받치고 화가 나도 굳게 윗입술을 물고 참아야 한다고 어릴 때부터 배운다. 'Keep calm, Carry on'이란 2차 대전 구호도 같은 맥락이다. 난리가 나도 '호들갑 떨지 말고 하던 일 계속하자'는 말이다. 지금도 영국인이 워낙 좋아해 관광 기념품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문구다.

영국인은 희로애락을 안으로 감추고 밖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걸 최고의 미덕으로 친다. 특히 사회 지도층은 무조건 지켜야 하는 품성이다. 고위 정치인이 공개 석상에서 화를 내거나 눈물을 보이면 거의 정치 생명이 끝이 난다고 봐도 된다. 국가 지도자는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천둥 번개가 치고 벼락이 떨어지는 파도 속에서도 국가라는 함선을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끌고 갈 선장은 그래야 한다는 뜻이다.

메이 총리는 임기 중 당권 도전을 여러 차례 받았는데 막상 사임을 발표하려니 그간 참았던 감정을 억제하기 힘들었으리라는 동정의 여지가 있긴 하다. 그래도 '세기의 약체 총리'였다는 평에 더해 눈물까지 보였으니 세간의 비아냥은 더욱 벗어나기 어렵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