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왕위 계승 갈등에서 비롯된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백년전쟁(1337~1453)’은 중세 봉건체제의 종말을 앞당겼다. 100년 넘게 초유의 광역 전쟁을 치르며 전통의 기사-소작농 체제는 근대적 형태의 상비군 체제로 서서히 전환했고, 군을 통솔하며 중세 국가는 근대적 중앙집권 국가의 틀을 갖춰 나갔다. 세대를 이어 전쟁을 치르는 동안 국민-민족의식도 뚜렷해졌다.
전쟁 초기 도버 해협을 건너 본격적인 프랑스 공략에 나선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 군대가 북부 관문인 항구 도시 칼레 시민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만 10개월간 발이 묶인 일과 항복 후 칼레 지도자들의 희생정신은 600년도 더 지난 오늘날까지도 민족의식의 불쏘시개로 남아 있다. 물론 후자의 이야기는 창작으로 밝혀졌지만, 예나 지금이나 이데올로기 생태에 사실 여부는 중요한 게 아니다.
다시 전쟁 이야기로 돌아가서, 앞선 크레시 전투에서 괴멸적 패배를 당한 프랑스 필립 6세 군대는 북프랑스 방어를 칼레의 인구 7,000여 명에게 맡긴 채 후퇴했다. 칼레 시민들은 1346년 9월부터 이듬해 7월 말까지 잉글랜드 군의 공성전에 맞서 농성했다. 포위된 처지라 후방지원을 기대할 형편이 아니었다. 더위와 갈증과 굶주림에 시민들이 탈진해가던 1347년 8월 1일, 칼레의 대표자들은 마침내 잉글랜드 측에 항복 의사를 알렸다. 이틀 뒤 에드워드 3세 군대가 칼레에 진주했다.
로댕의 조각으로 잘 알려진 ‘칼레의 시민’이야기는 14세기 말 프랑스의 한 역사가(Jean Froissart)가 지어낸 것으로 밝혀졌다. 10개월이나 버틴 칼레 시민에게 화가 난 에드워드가 시민 대표자 6명의 목숨을 요구했고, 시장 등이 책임의식과 희생정신으로 자진해서 나섰다는 기록. 하지만 현대 사가들은 당시 그들이 넝마 차림으로 목에 사슬을 두른 채 점령군을 맞이한 것은, 자비를 구하는 관행적 의식이었다고 말한다.
창작 버전은 프랑스가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에 짓눌리던 19세기 보-불전쟁 시대에 프랑스인의 애국-민족주의를 충동질하는 서사로 부활했다. 백년전쟁의 또 한 명의 영웅 ‘잔 다르크’의 이야기도 그렇게 그 시기에 사실상 창작됐다. 권력자가 민족주의에 표나게 기댈 때는, 등 뒤에 불안한 진실이 있거나 발밑이 불안정할 때이기 쉽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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