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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알퍼의 한국 일기] '기리'라 불리면 어때… 영국인들의 못말리는 '스페인 태양' 중독

바람아님 2019. 7. 30. 07:56

(조선일보 2019.07.30 팀 알퍼 칼럼니스트)


'좋은 날씨'란 어떤 걸까… 어디 출신이냐에 따라 달라져
여름 태양, 한국선 필사적 회피… 영국인들 화상 입어도 일광욕
韓 습할 땐 영국 날씨 그리워도 일주일만 있으면 한국 오고파


팀 알퍼 칼럼니스트팀 알퍼 칼럼니스트


한국 사람들이 "날씨 좋다"고 말하는 걸 듣게 되는 시기는 일 년에 두 번, 늦은 봄에서 초여름

그리고 초가을이다. 나 또한 외국인 친구들이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고 하면 5월에서 6월 초

혹은 9~10월을 추천한다. 싱그러운 녹색을 띤 어린 나뭇잎과 꽃이 만개한 나무들로 가득한 산야,

당장 폭발이라도 할 것 같이 울긋불긋한 컬러로 물든 산…. 한국의 봄과 가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하지만 내게 초여름은 그 이상을 의미한다. 무거운 외투와 목도리, 긴 겨울 동안 싫증

나도록 두르고 다녔던 방한용품으로부터 해방이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첫 번째 가을 바람 역시 또 다른 종류의 해방을

의미한다.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냄새, 꿉꿉함으로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기나긴 한국의 여름으로부터 해방이다.


영국에서 '좋은' 날씨에 대한 개념은 많이 다르다.

태양이 무섭게 이글거리는 날씨는 영국 사람들에게는 매우 이상한 영향을 끼친다. 뜨거운 태양을 마주하는 날이면

자신의 살갗을 한 치도 남기지 않고 노출하고 싶은 강력한 충동을 느낀다. 수은주가 치솟는 날이면 한국의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인부들이 눈을 제외한 신체의 모든 부위를 마스크와 팔 토시, 긴 바지로 가린 것을 볼 수 있다.

반면 영국의 인부들은 흉측한 장면을 연출한다. 모두가 짧은 바지에 상의는 벗은 반 벌거숭이 차림이다.

그들의 창백한 피부는 살아 있는 게가 빨갛게 익어가는 것 같이 햇볕에 홀라당 익어간다. 사무직도 예외는 아니다.

점심시간 때 남자나 여자나 벗을 수 있을 만큼 최대한 옷을 벗고 잔디에 널브러져 피부 발진을 유발하는 온갖 종류 벌레들에게

물어뜯기며, 가장 강력한 알로에 젤로도 치료될 수 없는 화상을 입을 것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일광욕을 즐긴다.

 

[팀 알퍼의 한국 일기] '기리'라 불리면 어때… 영국인들의 못말리는 '스페인 태양' 중독
/일러스트=이철원


영국 사람들은 화창한 날씨를 만나면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경기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경기 시간 90분은 영국 날씨를 염두에 둔다면 상당히 긴 시간이다.

운이 좋은 경우라면, 한 경기 동안 영국의 사계절 날씨를 경험할 수 있다.

따가운 햇볕이 얼마간 내리쬐다 무섭게 차가운 바람과 함께 갑자기 양동이로 퍼붓듯 비가 쏟아져 내린다.

그러다 다시 파랗게 맑은 하늘이 보인다. 운이 나쁜 경우라면, 경기 내내 쏟아지는 빗방울을 온몸으로 막아내야 한다.

정말 운이 나쁜 날이라면, 테니스공만 한 우박을 맞으며 곤혹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한다.

이탈리아나 브라질처럼 날씨가 좋은 나라에서 온 선수들을 보면, 이런 날씨를 참아내며 90분을 뛰려면 고액 연봉을

받아도 마땅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런 이유로 구름 없는 여름 하늘은 영국 사람들에게 금 덩어리가 가득 든 주머니만큼이나 소중하다.


영국 사람들은 이런 날을 위해 아파트보다는 정원이 딸린 단독주택을 선호한다.

그런 날에는 정원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며 책을 읽거나, 친구나 이웃을 초대해 시끌벅적한 바비큐 파티를 벌이며

중세의 귀족이 된 듯한 기분을 만끽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영국 사람들이 스페인과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을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스페인의 날씨와 사랑에 빠졌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사실 영국 사람들은 스페인 문화에는 일말의 관심조차 없다. 그러나 스페인의 태양은 엄청나게 중독적이다.

카탈루냐의 코스타 브라바와 같은 해변 도시는 영국인들로 넘쳐난다.

이들은 휴가를 즐기러 왔거나, 아예 이곳에 집을 사서 정착한 후 남은 인생을 태양과 함께하려는 사람들이다.

스페인 문화나 언어를 배우려는 노력은 전혀 없이 밤낮으로 술이나 마셔대는 이런 영국 이주자나 여행객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스페인 사람들은 비난하는 어조로 그들을 '기리(Guiri)'라고 부른다.

'교양 없는 영국 게으름뱅이'라는 뜻이다. 스페인의 뜨거운 태양에 대한 '기리'들의 열망은 스페인 술집 사장이나

부동산업자들의 지갑을 두둑하게 만들었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해변인 코스타 델 솔에는 영국 돈이 넘쳐난다.


우리가 어디에 살든 좋은 날씨는 우리를 싫증 나게 하는 날씨로부터 피난처가 될 수 있다.

축축하고 두꺼운 이불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이 습한 한국 여름이 다가오면 나는 영국의 변덕스럽고 쌀쌀한 날씨와

회색 하늘이 그리워진다. 하지만 다시 영국을 방문하게 된다면, 종잡을 수 없는 영국 날씨를 일주일쯤 겪은 후,

온화하고 예측이 가능한 한국 날씨를 무척이나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