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08.24 장강명 소설가)
과학
튀고 싶어 하는 이들일수록 자세와 분위기만 도발적이고, 정작 하는 말의 내용은 의미 없고
따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조차 자기 생각이 아닌 남들 얘기를 이것저것 짜깁기한다.
사람도 책도 그런 부류가 넘쳐나는 시대다.
벽돌책을 읽어서 좋은 점 하나는 그런 치들을 거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일단 제작비가 많이 드니까 출판사들이 원고를 신중하게 고른다.
그리고 대체로 긴 글은 깊은 사유 없이 쓰기 어렵다.
760쪽짜리 존 그리빈의 과학사 서적 '과학'(들녘)은 사람으로 치면 다소 논쟁적인 자기 주관을 점잖고 차분하게
설명하는 신사다. 이 책의 논쟁적인 면모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과학사를 다룬다면서 르네상스 이후 서양과학사가
아닌 영역, 예컨대 고대 그리스나 동양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토머스 쿤이 주창한 과학혁명 개념을 '과학의 막장에서 전혀 일해본 적 없는 사회학자들이 좋아하는 신화'
(560쪽)라고 부정하는 것이다. 책은 과학에서 '혁명'이라는 단어를 써도 되는 사건은 양자혁명 하나뿐이라고 주장한다.
이 두 관점은 기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현대 과학은 연구 결과를 쌓으며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공동 작업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고대와 동양의 업적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 저자가 인정하는 예외적 천재는 아이작 뉴턴이지만,
뉴턴이 없었어도 그가 한 일을 몇 십 년쯤 뒤에 누군가 해냈을 거라고 한다.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과학
존 그리빈 지음/ 강윤재;김옥진 옮김/ 들녘/ 2004/ 759p
409-ㄱ565ㄱ/ [정독]인사자실서고/ [강서]2층
영웅도 혁명도 없다고 주장하지만 흥미진진한 '연구자들의 드라마'는 가득하다.
그 자신 천체물리학자인 저자는 자연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해 좌절하면서 동시에
돈과 안전과 명예를 추구하고, 누구보다 인정에 목마른 과학자들의 초상을 세심히 그린다.
데카르트는 과학계에 심오한 영향을 남겼지만 진공을 인정하지 않는 바람에 18세기 초까지
후학들을 헷갈리게 했다. 퀴리 부인은 훌륭한 과학자였지만 그녀가 받은 노벨상 두 개는
사실 같은 연구에 대한 중복 수상이었다.
멘델과 다윈은 그저 운이 좋았던 아마추어가 결코 아니다.
앞서 말한 논쟁적 관점만 주의한다면 풍성한 선물 꾸러미처럼 읽을 수 있는 교양 도서다.
종교재판관의 눈치를 살피며 진행해야 했던 과학 연구들이 젠틀맨 계급의
호사스러운 취미가 되는 과정이나, 천문학, 물리학, 지질학, 생물학 같은 분야가 서로 주고받은 영향 이야기도 흥미롭다.
'人文,社會科學 > 책·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포토인북] '왕좌의 게임' '반지의 제왕' '어벤져스' 공통점은?… 『북유럽 신화』 (0) | 2019.08.25 |
---|---|
[편집자 레터] 선비, 사무라이, 상인 (0) | 2019.08.25 |
[다시 읽는 명저] "공정성 잃은 군주는 발톱 잃은 호랑이" (0) | 2019.08.23 |
[이코노 서가(書架)] 포경업에서 시작된 벤처캐피털… 증기기관·방적기 개발에 돈 대 (0) | 2019.08.20 |
책, 세대 간 불평등을 저격하다 (0) | 2019.08.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