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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모·버스 안내양·여공… 고난·눈물 가득했던 삼순이의 전성시대

바람아님 2019. 9. 8. 12:22

(조선일보 2019.09.07 김태훈 출판전문기자)


상경한 소녀의 첫 직장은 식모, 버스 차장·여공은 주경야독
소설·신문 등 문헌과 인터뷰로 1950~80년대 세밀하게 복원
이들이 흘린 땀·눈물 빼고는 대한민국이 이룬 성취 설명 못해


'삼순이'삼순이

정찬일 지음|책과함께|2019.09.16.|524쪽|2만5000원


지난 세기 대한민국이 기적과도 같은 발전을 거듭하는 동안 함께 땀 흘렸으나 지금은 잊힌

여성들이 있다. 각각 식순이, 차순이, 공순이로 불렸던 식모, 버스 차장(안내양), 여공들이다.

1950~80년대는 이 땅 곳곳에 숱한 순이들이 넘쳐났다는 점에서 그녀들의 전성시대였다.


여성 이름에 숙(淑)이 순(順)보다 많이 쓰였던 시절이지만 그녀들은 '순'으로 불렸다.

주연이 아닌 조연이었고, 시키는 대로 따라야 했으며, 자신을 낮춰 보는 세상의 시선을

견뎌야 하는 이들에게 부여된 이름이었다.

저자가 고난과 눈물로 가득했던 그녀들의 전성시대를 복원했다. 소설, 영화, 신문,

문헌 기록을 뒤졌고, 삼순이 출신 여성들을 만나 구술을 받아 적으며 우리가 지나온

시절의 풍경을 세밀하게 재현했다. 익숙한 얘기라 생각했는데 막상 읽다 보면 가슴 뭉클해진다.


오늘날 식모의 원형은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에서 건너온 주부들은 한국 가사도우미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식모가 대표적인 여성 일자리란 인식이 이때 자리 잡았다.

1938년 전체 여성 구직자 2만7014명 중 식모 취직자는 2만3527명으로 87%를 넘었다.

이들은 조선 가정보다 일본 가정을 선호했다. 임금이 조선 가정의 두 배 이상이었고 대우도 인간적이었기 때문이다.


식모의 처우는 해방 이후 오히려 나빠졌다. 6·25로 전쟁고아가 쏟아져 나온 것이 결정적이다.

먹여주고 재워만 달라는데 안 쓸 이유도 없었다. 심지어 판자촌에서 셋방살이하면서도 식모를 뒀다.

1967년 1월 15일 자 조선일보는 '서울 성북구 셋방 사는 가구의 7할5푼이 식모를 뒀다'고 보도했다.



왼쪽부터 식모를 소재로 한 1969년 영화 '식모 삼형제', 만원 버스에 매달려 가는 버스 안내양,

1970년대 가발 공장의 여성 노동자. /책과함께·조선일보DB


식모는 시골에서 상경한 소녀의 첫 직장이었다. 적응되면 이후 공장이나 미용실, 버스회사로 옮겼다.

일제 강점기 버스 차장은 지금으로 치면 여객기 스튜어디스였다.

여자 일자리가 귀했고 상대적으로 고임금이어서 식모보다 3배나 벌었다.

양장 투피스 유니폼을 입었고 미모가 채용 기준이어서 일등 신붓감으로 통했다.

그러나 버스 안내양은 하루 18시간을 콩나물버스에서 시달리고 잠은 4시간만 자는 중노동이었다.

각성제를 달고 살았고, 너무 오래 서 있다 보니 부인과 질환이 많았다.

승객과 요금 시비를 벌이다 폭행당하거나 달리는 버스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는 일이 반복됐다.


마음 숙연해지는 사연들을 곳곳에서 만난다.

대부분 10대인 버스 안내양의 급여 사용처를 조사했더니 65%가 부모 생활비에 보태거나 형제 학비에 들어갔고,

유흥비는 3.1%에 불과했다. 그녀들은 월급으로 동생들에게 빵과 과자를 사주며 "이 순간처럼 땀 흘린 보람을

느껴본 적은 없다. 피곤도 굴욕도 내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못 배운 한(恨)을 풀기 위한 노력도 눈물겹다. 서울 도봉구에 있던 영신여객은 이틀 일하고 하루 쉴 때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는 소녀들을 위해 학원반을 운영했다. 이 버스회사는 해마다 검정고시 합격생을 배출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정부가 격일제를 도입해 근무 여건을 개선하려고 했지만 안내양들은 "근무 일수가 줄면 임금도 준다"며 반대했다.

그렇게 번 돈을 쪼개 학원에 다녔다.

버스회사에서 이직한 여성이 찾아가는 곳은 공단이었다. 근무 여건이 상대적으로 좋았고 급여도 더 많았다.

산업체 부설학교를 세우게 된 사연이 감동적이다.

1976년 구로공단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어린 여공의 손을 잡고 "소원이 무엇이냐?" 물었다.

"또래처럼 교복 한번 입어보고 싶다"는 대답에 감정이 북받친 박 대통령은 소녀들이 보는 앞에서 이렇게 지시했다.

"법을 뜯어고치고 절차를 바꿔서라도 공단 아이들에게 똑같은 교육 기회를 주라."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1977년 등장한 산업체 부설학교다.

많은 여공이 여학생의 상징인 단발머리를 하기 위해 파마를 풀고 긴 머리를 자르며 기뻐했다.


1981년까지 불과 4년 만에 전국에 143개교가 생기며 들불처럼 퍼졌던 산업체 부설학교는 남아 있던

마지막 학교의 설립 인가가 2016년 취소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가계 소득이 오르고 산업구조가 선진화되면서 여공의 수요와 공급이 모두 줄었기 때문이다.

이 소녀들이 흘린 땀과 눈물을 빼고 우리가 이룬 성취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