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11.02 백영옥 소설가)
백영옥 소설가
김진영의 '아침의 피아노'를 읽다가 '알았다' '알겠다'라는 동사가 유독 자주 나온다는 걸 느꼈다.
'글을 어떻게 쓰는지 알았다'거나 '흐른다는 게 산다는 건지도 알겠다' 같은 문장 말이다.
이 책이 암 투병 중에 쓰였다는 사실은 독서 중에 알았다.
"물들은 자면서도 '쉬지 않고 흐른다'는 걸 알았다. 흐른다는 게 산다는 건지도 알았다.
… 물들은 급한 곳에서는 우렁차고 평평한 곳에서는 잠시 머물며 파문을 만든다.
그러면서도 낮은 곳으로 흐르는 걸 잊지 않는다. … 글을 어떻게 쓰는지도 알겠다.
그건 백지 위에 의미의 수사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오선지 위에 마침표처럼 정확하게 음표를 찍는 일이다.
그건 문장과 악보의 만남이다."
사유하는 것이 직업인 철학자의 입에서 '이제야'라는 부사를 자주 발견하고 역설적이지만 위안을 느꼈다.
아프고 나서야 건강의 중요함을 알고, 떠나고 나서야 가족의 귀함을 알게 되는 건 인간의 숙명 같다.
그러니 잃지 않고서도 소중함을 매번 발견한다면 얼마나 귀한 일인가.
평생을 다정함과 온화함을 조용히 유지하는 것이 정신적인 일이라 믿었다는 철학자가
통증 뒤에 얻은 게 '생의 명랑성'이라는 말 앞에서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값을 흥정하는 야채 장수의 큰 목소리, 급한 곳에서 떨어지는 우렁찬 물소리 같은 것들 말이다.
보통 날의 고마움을 포착하는 그 예민한 문장들이 아침의 피아노 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이제껏 지나치게 감정주의자였다. 그래서 감정이 원하고 시키는 대로 행동해 왔다.
그러나 행동은 감정의 시녀가 아니라 오히려 주인이기도 하다.
새로운 감정이 필요할 때마다 '행동'이 감정을 가르치도록 인도해야 한다.
그래야 감정의 균형이 잡히고 길이 보인다."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마다 책상을 정리하고, 이불을 털고, 창문을 닦는다.
깨끗해진 창 속 내게 웃는다. 다시 다짐한다.
그렇게 내 행동이 흐트러진 감정을 가르치도록 말이다.
앞으로 여러 번 잊겠지만 잊을 때마다 다시 기억하려 한다.
아침의 피아노 :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 저자 김진영은 자본주의 문화와 삶이 갇혀 있는 신화성을 드러내고 해체하는 일에 오랜 지적 관심을 두었다. 시민적 비판정신의 부재가 이 시대의 모든 부당한 권력들을 횡행케 하는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믿으며 〈한겨레〉, 〈현대시학〉 등 의 신문·잡지에 칼럼을 기고했다. |
'人文,社會科學 > 敎養·提言.思考'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영옥의 말과 글] [125] 거울이 필요한 이유 (0) | 2019.11.23 |
---|---|
<살며 생각하며>단풍잎 같은 마음들 (0) | 2019.11.23 |
[삶과 문화] 우에노의 케이 (0) | 2019.11.19 |
[배영대 曰] 동백꽃은 누가 피우나 (0) | 2019.11.18 |
[백영옥의 말과 글] [124]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0) | 2019.1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