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20.01.22. 03:13
11세기 이슬람과 전투는커녕 기독교 백작과 싸워 '더러운 배신자' 소리까지 듣던 엘시드는 어떻게 영웅이 됐나
- 팔레스타인 전쟁터처럼 변한 半島
8세기에 넘어온 무슬림과의 투쟁 '문명의 충돌'보다 정치집단 경쟁.. 엘시드는 돈 받고 전투하는 용병
- 1898년 美에 전쟁 지고.. 프랑코까지
스페인, 쿠바·필리핀 등 빼앗기자 국운 살릴 영웅으로 엘시드 '발굴'
프랑코는 스스로 '제2 엘시드'로
부르고스(Burgos) 대성당의 첫인상은 화려한 교회이자 동시에 강력한 요새 같다는 것이다. 스페인 북부 카스티야-레온주의 수도인 부르고스는 재정복운동(Reconquista)의 주요 거점이었고, 특히 스페인의 민족 영웅 엘시드(El Cid· 1043~1099)가 묻힌 곳이기도 하다. 성당 내부에는 엘시드와 부인 도냐 히메나(Doña Jimena)의 무덤이 있고, 벽에는 '엘시드의 궤(Cofre de El Cid)'가 걸려 있다. 12세기에 나온 무훈시 '엘시드의 노래(Cantar de mio Cid)'에 의하면, 엘시드는 과도한 용맹으로 인해 오히려 국왕의 분노를 사서 추방되었는데 이때 자신을 따르는 300명의 기사 군단을 유지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유대인 고리대금업자에게 거액을 빌리고 대신 이 궤를 담보로 맡겼다고 한다. 돌멩이와 모래가 가득 찬 이 궤에 금과 보석이 있다고 유대인들을 속였다고 하니, 요즘 같으면 금융사기 범죄이지만 중세에는 통쾌한 미담으로 여겼던 듯하다. 부르고스 시내 광장에서는 위용을 자랑하는 엘시드의 기마상도 볼 수 있다.
엘시드는 누구인가?
스페인의 중세사는 대개 이슬람 세력과의 투쟁으로 정리하곤 한다. 8세기 초 무슬림들이 북아프리카로부터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스페인 땅에 들어와서는 단기간에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을 지배했다. 북쪽 변두리 산악 지역에서만 작은 기독교 공국들이 간신히 존립을 유지했다. 이후 기독교 세력이 오랜 기간에 걸쳐 조금씩 이슬람 세력을 밀어내면서 국토를 회복해 갔다. 그 과정에서 무슬림과 싸우는 정치 단위들이 형성되었다. 동쪽의 카탈루냐 공국, 피레네 산맥 서쪽의 바스크 공국(후일 나바라 왕국으로 성장했다가 프랑스에 합병된다), 나바라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한 아라곤, 북서쪽의 아스투리아스가 점차 확장하여 레온과 합쳐지며 형성된 카스티야 등이 그런 사례들이다. 이들 사이의 이합집산 끝에 최종적으로 카스티야와 아라곤으로 정리되고, 이 두 나라가 합쳐져 오늘날의 스페인이 만들어지는 한편, 남서쪽에서 독자적 단위를 이룬 포르투갈이 먼저 별개 국가로 발전했다. 이렇게 보면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역사는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여 투쟁하며 가톨릭을 수호하는 신성한 왕정의 성립 과정으로 정리할 수 있으리라. 그렇지만 역사의 실상은 그처럼 단순하지 않다. 기독교권과 이슬람권이 단일한 전선에서 부딪치는 '문명의 충돌'보다는 양측 모두 다수의 정치 단위가 이해관계를 좇아 복잡하게 얽혀서 경쟁하는 판에 가깝다.
서기 천 년이 지나면서 스페인 내 이슬람권은 분열되고 세력이 약화되어 타이파(taifa)라 불리는 소규모 제후국들로 나뉘었다. 점차 강성해지는 기독교 국가들은 이런 무슬림 소국들을 상대로 압박과 거래를 병행하며 이익을 얻고 있었다. 무슬림 국가들이 원하는 군사 원조를 제공하면서 조공을 받는 식이다.
민족 영웅이라는 엘시드의 활동도 사실 이런 성격이었다. 문학 작품이나 민족주의 역사에서는 엘시드가 이슬람 세력들과 맹렬한 전투를 벌이며 영웅적 성과를 거둔 것으로 그려졌지만 실상은 그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카스티야의 귀족 출신으로 본래 이름은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Rodrigo Diaz de Vivar)지만 아랍어 알사이드(al-sayyid, '영주')에서 유래한 엘시드로 더 잘 알려졌다. 그의 진면목은 이슬람 국가든 기독교 국가든 비용을 잘 지불하는 측이면 누구에게나 군사 서비스를 제공하는 용병에 가까웠다. 당시는 기독교적 신념을 위해 헌신한다는 이념은 찾아보기 힘들던 때다. 다만 그는 탁월한 전사여서 전투에서 계속 승리를 거두었고, 후일 독립해서 직접 이슬람 소국들로부터 공물을 수취했다.
死後에 영웅이 된 엘시드
기독교 신자들이 일치단결하여 이슬람이라는 적들과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는 이념은 오히려 엘시드가 죽은 이후에 나왔다.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예루살렘의 예수 성묘를 되찾아야 한다는 십자군 운동을 제창하여 유럽 전역에 성전(聖戰)의 열기가 달아올랐다. 바깥에서만 싸울 게 아니라 유럽 안에 있는 신앙의 적부터 타파해야 한다는 이념이 불타올라서 이베리아 반도는 팔레스타인과 같은 전쟁터로 변모했다. 경건한 신앙이 기독교 스페인을 새로이 일깨웠다. 유럽 내 가장 중요한 성지순례지 중 하나인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는 12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전 유럽의 순례자들이 몰려들었다. 재정복운동은 사실상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결과 13세기 후반이면 알람브라 궁전으로 유명한 스페인 최남단의 그라나다만 빼고 거의 전역이 기독교 영토가 되었다. 마지막까지 잔존해 있던 이슬람 세력을 최종적으로 축출한 때는 1492년이다. 이해는 재정복운동이 완수되어 무슬림을 유럽 대륙에서 완전히 몰아냈고, 그 여파로 유대인들도 축출했으며, 동시에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중요한 해다.
예상과 달리 19세기까지도 엘시드는 민족 영웅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슬람 세력과 싸우기는커녕 같은 기독교 세력인 바르셀로나 백작과 전투를 한 사실로 인해 '거짓말쟁이' '더러운 배신자' 취급을 받기도 했다. 엘시드가 다시 영웅으로 되살아난 계기는 1898년 미국과 스페인 간의 전쟁(미서전쟁)이다. 한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영국보다 스페인이 먼저 이 표현을 썼다)이었던 스페인은 신흥 해양 강국으로 떠오르는 미국 앞에 맥없이 무너져서, 쿠바와 필리핀 등 식민지를 빼앗겼다. 이처럼 국운이 쇠락하는 상황에서 국가의 명예를 되살려줄 영웅이 필요했던 것이다. 엘시드는 더 나아가서 20세기 전반의 스페인 내전 상황에서 프랑코 독재 정권에 이용되었다. 1939년 내전에서 승리를 굳힌 프랑코 장군은 자신을 제2의 엘시드로 묘사했고, 1955년 그의 첫 번째 정치적 수도였던 부르고스에 거대한 엘시드 기마상을 건립했다. 영웅은 결코 중립적인 존재가 아니어서,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새롭게 주조되곤 한다.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별빛이 인도해 발견한 야고보 성인의 묘지]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는 최근 우리나라 사람들도 많이 찾는 성지다. 이곳 성당에는 산티아고 성인의 묘소가 있다. 이때 '산티아고'는 예수의 12제자 중 한 명인 성 야고보(영어로는 Saint James)를 가리킨다. 12세기부터 알려진 전승에 의하면 야고보 성인은 갈리시아 지방에서 전도 활동을 한 후 성지(聖地)로 되돌아갔다가 참수당하며 순교했다. 제자들이 시신을 수습하여 야파(Jaffa)로 가서 그곳에서 신비한 돌 선박을 타게 되었는데, 이 배는 곧 이들을 갈리시아 지방으로 데려갔다. 제자들은 이곳의 이교도 여왕 로바(Loba, '암늑대'란 뜻)에게 매장지를 달라고 부탁했다. 로바는 용을 부려 이들을 죽이려 했지만 십자가를 보자 용이 터져서 죽었고, 결국 현재의 성당 자리에 야고보의 시신을 묻었다.
오랫동안 숨겨져 있던 야고보 성지는 9세기에 펠라기우스(Pelagius)라는 은자에게 발견되었다. 이 성지를 되찾을 때 별빛이 인도하였다고 하여 콤포스텔라(Compostella, '별빛이 인도한 땅'이란 의미의 Campus Stellae 변형)라는 이름이 붙었다. 기독교도들이 이슬람 세력과 전투를 할 때면 야고보 성인이 기사의 모습으로 현현(顯現)하여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군은 야고보를 수호성인으로 삼았고, 적을 향해 돌진할 때 외치는 전투 구호도 '산티아고(¡Santiago!)'가 되었다. 중세에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는 유럽 전역에서 신자들이 찾아오는 중요한 순례지가 되었다. 20세기에 산티아고 순례가 다시 부흥한 데에는 스페인 가톨릭 역사를 자신의 프로파간다에 이용하고자 하는 프랑코 독재정부의 의도가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순례길(camino)은 그런 부정한 의도를 초월하여 평화와 성찰의 길이 되었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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