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20.01.29 플라타이아=송동훈 문명탐험가)
[페르시아와 전쟁에 앞장선 플라타이아]
아테네와 동맹 의리 지켜 - 인접 폴리스 테베의 위협 속에
아테네와 동맹 맺어 독립 유지, 마라톤 전투에 全軍 파병 헌신
페르시아의 2차 침공 때도 참전 - 페르시아 육군 축출에 기여
플라타이아 평원에서 전투… 승전 뒤 동맹군의 찬사 받아
독립 보장 맹세 저버린 스파르타 - 아테네와 전쟁 벌어지자 침공
플라타이아는 2년간 버텼으나 아테네의 외면 속에 멸망당해
아테네에서 차로 30분 정도 올라가면 너른 평야가 나타난다.
산이 많고 척박한 그리스에서는 보기 드물게 풍요로운 보이오티아(Boeotia)다.
다양한 작물과 채소의 재배지가 이어지고, 사방의 스프링클러에서는 쉴 새 없이
물이 뿜어져 나온다. 시선을 멀리로 옮기면 야트막한 구릉이 이어져 있다.
평안하다. 그러나 언제나 이렇지는 않았다.
긴 역사 속에서 이곳 주민들은 훨씬 많은 시간을 긴장 속에서 보냈다.
그리스의 운명과 역사를 가른 중요한 전투가 몇 차례나 벌어진 분쟁의 땅이기도 했다.
이유는 보이오티아가 그리스의 남부와 중부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보이오티아의 중심 도시는 테베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페니키아 왕의 아들 카드모스가 세웠다.
유명한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 오이디푸스(Oedipus)가 왕이었던 도시이기도 하다.
한때 스파르타를 꺾고 그리스 세계의 패권을 잡은 적도 있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반항한 대가로 불탔다(기원전 335년).
훗날 재건됐지만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데는 실패했다. 지금도 특색 없는 지방 도시에 불과하다.
오히려 플라타이아(Plataea)가 인상적이다.
개인적으로 보이오티아에서 가장 궁금했던 고대 도시이기도 했던 플라타이아는 테베에서 서남쪽으로 직선거리로
1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오늘날 이곳은 폐허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남은 게 별로 없다.
표지판을 보고 찾아간 고대 도시에는 잡초만이 무성했고, 무너진 일부의 돌벽만이 쓸쓸하게 도시의 흔적을 전하고 있다.
정말 도시가 있기는 했던 걸까? 드론을 띄워 공중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서야 도시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플라타이아는 역사적으로 영원히 기억되는 지명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승리, 자유, 명예의 동의어이기도 했다.
그 플라타이아는 어쩌다 폐허만을 남기고 사라졌을까?
마라톤에서 아테네와 함께 싸우다
플라타이아는 작은 폴리스다. 비록 작지만 명예롭고 존경받았다.
플라타이아가 처음 역사에 이름을 날린 건 기원전 490년 늦여름이었다.
당시 마라톤에서는 아테네가 홀로 페르시아의 대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리스의 많은 폴리스가 아테네의 위기를
외면하고 있을 때, 플라타이아는 유일하게 같이 싸우기 위해 마라톤에 파병했다.
중장보병은 1000명을 넘지 못했지만 아테네는 기꺼이 감사했다. 그들이 플라타이아의 모든 중장보병이었기 때문이다.
플라타이아는 동맹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왔다.
플라타이아는 테베에서 코린토스, 스파르타, 혹은 아테네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었다.
보이오티아 전체를 지배하고자 하는 야망에 불탔던 테베는 언제나 플라타이아를 정복하고자 했다.
전략적 교차로에 있으나 작고 힘없는 폴리스의 운명은 고단할 수밖에 없다.
자유와 독립을 지키기 위해 아테네에 의존했고, 아테네는 이웃한 테베의 성장을 막기 위해 플라타이아를 도왔다.
오늘날도 세계 도처에서 보게 되는 국제정치의 한 장면이었다.
그 동맹에 대한 신의를 지키기 위해 누구도 아테네의 승리를 예상하지 못했던 전투에 플라타이아는
자신의 운명을 걸었던 것이다. 무모하게 신의를 지킨 데 대한 보상은 컸다.
전투에서 아테네는 승리했고, 플라타이아는 그 영광을 나눠 가졌다.
위대한 승리의 땅, 플라타이아
마라톤은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다.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의 대대적인 침공이 시작됐다.
대부분의 폴리스는 강한 침략자 편에 붙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비롯한 31개의 폴리스만이 페르시아에 맞섰다.
플라타이아는 그 소수 중 하나였다. 테베는 지역의 맹주였지만 시종일관 페르시아의 주구(走狗)였다.
그리스 세계의 자유와 독립이란 가치를 테베는 한 번도 우선시한 적이 없다. 그 작은 플라타이아를 페르시아의 대군이
물려와 정복하고 불태웠다. 주민들은 일찌감치 피란을 떠났지만, 오랜 터전은 폐허로 변했다.
플라타이아의 고고학 유적지에는 약간의 무너진 토대와 돌무더기들만이 남아 있다(오른쪽 작은 사진).
드론 사진 속의 어렴풋이 남은 성곽과 도로의 흔적을 보고 나서야 한때 도시가 있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었다(큰 사진).
유적지 뒤로는 풍요로운 평야가 펼쳐져 있다.
플라타이아가 멸망한 진짜 이유는 저 평야를 지킬 힘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서경석 사진작가
살라미스에서 아테네를 중심으로 뭉친 그리스 연합해군에 대패한 후 페르시아 대왕 크세르크세스는 소아시아로 돌아갔다.
그리스 정복을 포기한 건 아니었다. 대왕의 사촌이며 맹장인 마르도니우스(Mardonius)가 30만 명의 정예와 남았다.
그들을 완전히 몰아내려면 살라미스만으로는 부족했다. 육지에서의 승리가 절실했다.
그리스 남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맹주 스파르타가 동맹군을 이끌고 앞장섰다. 아테네도 8000명의 중장보병을 보탰다.
최종 승리를 위해 바다에서 다시 뭍으로 올라온 것이다.
고향을 잃고 난민으로 떠돌던 플라타이아의 중장보병 600명도 참전했다.
그리스 연합군의 규모도 4만5000명에 달했다(헤로도토스, '역사').
두 군대는 페르시아군의 병참본부였던 테베 인근, 플라타이아 평원에서 대치했다.
불탄 플라타이아가 훤히 보이는 곳이었다. 전투는 보급이 원활치 않아 배고픔과 갈증에 시달리던 그리스 연합군이
한밤을 이용해 플라타이아 쪽으로 후퇴하는 것을 계기로 시작됐다. 어둠과 낯선 지형 때문에 군대는 뿔뿔이 흩어졌다.
일부는 아침까지 철군해서 진을 치는 데 실패했다.
마르도니우스(Mardonius)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총공격을 명했다.
페르시아군은 스파르타군과, 테베군은 아테네군과 맞붙었다. 혈전이었다.
스파르타는 최악의 상황에서 전투를 시작했지만 순식간에 판세를 뒤집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평생 같이 훈련했으며, 냉혹하게 창을 내지르는 전사들로 구성된 스파르타의 방진은
천하무적이었다. 마르도니우스(Mardonius)가 전사하자 페르시아군은 무너졌다.
마라톤, 살라미스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시 예상을 뒤엎고 그리스 연합군이 승리했다.
페르시아 제국의 위풍당당했던 원정은 결국 플라타이아에서 종결됐다.
스파르타와 아테네 모두에게 외면당하다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그리스 연합군은 폐허뿐인 플라타이아의
아고라 한복판에 모였다.
총사령관이었던 스파르타 섭정 파우사니아스(Pausanius)는
제우스에게 제물을 바치며 선언했다.
"플라타이아인들에게 영토와 도시를 돌려주어 독립 국가로
살아가게 하고, 어느 누구도 그들을 부당하게 공격하거나
노예로 삼는 일은 없을 것이다."
파우사니아스는 더 나아가 플라타이아가 공격당하면 그곳에 모인
동맹군이 '있는 힘을 다해' 도울 것이라고까지 했다.
위대한 승리에 이름을 부여했고, 도시의 모든 것을 걸고
두 번이나 페르시아와 싸운 폴리스에 대한 감사이며 배려였다.
플라타이아의 주적은 언제나 테베였으니,
이 선언은 사실상 테베를 향한 경고였다.
불행히도 스파르타의 약속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리스 세계의 패권을 둘러싸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터졌기 때문이다(기원전 431~404년).
스파르타를 맹주로 한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아테네가 이끄는 델로스 동맹 간의 충돌이었다.
전쟁은 스파르타의 강력한 동맹 테베가 아테네의 허약한 동맹 플라타이아를 야밤에 기습하면서 시작됐다(기원전 429년 3월).
그러나 테베의 기습은 실패했다. 플라타이아는 포로로 잡은 테베인 중 180명을 처형하고, 도시를 지킬 400명의 중장보병을
제외한 모든 주민을 소개함으로써 결사항전의 의지를 천명했다.
아테네는 80명의 중장보병을 파견해 동맹을 도왔다.
테베가 실패하자 스파르타가 직접 나섰다(기원전 429년 5월).
아테네와 전쟁에서 테베의 지원을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스파르타는 50년 전 자신들이 했던 맹세를 헌신짝처럼 버렸다.
스파르타를 상대로 버티기 어려웠던 플라타이아는 항복해도 좋을지를 동맹인 아테네에 물었다.
아테네는 전력으로 도울 테니 항복하지 말라 했다.
플라타이아는 아테네의 말대로 항복 대신 도시의 벽을 방패 삼아 항전에 들어갔다.
그들은 무려 2년 동안이나 스파르타의 포위를 버텨냈다.
그 엄혹한 기간 동안 자기 코가 석 자였던 아테네는 약속했던 도움을 주지 못했다.
결국 플라타이아의 수비대는 공정한 재판을 약속받고 항복했다. 스파르타는 다시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수비대는 처형됐고, 스파르타는 플라타이아를 테베에 넘겼다.
소원을 이룬 테베는 도시를 완전히 평지로 만들었다. 플라타이아의 최후였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폐허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플라타이아라는 이름조차 생소한 폴리스는 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 격렬한 투쟁의 시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도덕적으로 성실했고 명예로웠다. 그런 폴리스를 페르시아는 정복했고, 테베는 불태웠다.
스파르타는 협박했고, 아테네는 외면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폐허를 걷다 보니 애달팠다.
우리의 처지가 겹쳤기 때문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냉혹한 국제 정치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을까? 두려움에 소름이 돋았다.
[플라타이아 승리의 유물,
전리품으로 만든 황금솥…
이스탄불에 받침만 남아]
기둥 위에 있던 뱀의 머리 일부(위)는 현재 이스탄불 국립고고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서경석 사진작가
터키 이스탄불에 플라타이아와 관련된 유물이 남아 있다.
플라타이아에서의 위대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로부터
획득한 전리품 10분의 1로 황금으로 된 세발솥을 만들어 델포이 신탁에 봉헌했다.
세발솥은 청동으로 만든 삼두사(三頭蛇) 위에 얹혀 신탁의 제단을 장식했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제국 전역에서 가장 값지다는 유물들을 끌어모아
새로운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장식하는 데 사용했다.
황금 세발솥과 청동 삼두사도 이때 델포이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다.
황제는 그리스 세계가 페르시아 제국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는 이 귀한 유물로
원형경기장 한가운데를 장식했다. 세발솥은 사라지고 삼두사만 남아 그날의 영광과
사라진 폴리스의 슬픈 운명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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