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2020.01.29. 03:03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작품이 특정한 말이나 표현 때문에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주면 어떻게 될까.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이러한 질문을 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백인들은 이 소설을 ‘미국 근대문학의 출발점’으로 보고 트웨인을 ‘미국 문학의 아버지’로 받든다. 하지만 그러한 평가가 흑인들, 특히 어린 흑인 학생들이 소설을 읽으면서 받는 상처를 막을 수는 없다. 200번이 넘게 반복되는 단어 때문이다.
흑인에 대한 비하적인 표현인 ‘니거(nigger)’가 그 단어다. 애석하게도 우리의 인종적 편견으로 말미암아 오래전부터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통용되는 모욕적인 말……. 흑인들이 겪어야 했던 치욕과 피눈물의 세월이 집약되어 있는 말이다. 흑인 시인 랭스턴 휴스가 말했던 것처럼, 흑인들에게 그것은 ‘황소에게 붉은 천을 들이대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도발적인 말이다. 노예의 후손이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고 해서, 아프리카인들을 짐승처럼 포획해 대서양 너머로 끌고 와 짐승처럼 부렸던 야만적인 역사가 어디로 사라지는 건 아니다. 흑인들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치욕의 역사와 아직도 계속되는 인종차별의 현실을 떠올린다. ‘거의 완벽한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갖고 있는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사실 이 소설은 간접적이긴 하지만 노예제도를 고발하는 소설이다. 그러나 흑인들을 동정하는 시각에서 쓰였다고 해서 니거라는 말이 200번 이상, 더 정확히 말하면 213번이나 반복되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흑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토니 모리슨마저도 중학교 때 트웨인의 소설을 읽고 ‘소리 없는 분노’를 느꼈다고 했다. 그런데 이 소설이 고전이라는 이유로 미국의 일부 중고교에서 아직도 읽힌다. 역사적 상처는 그렇게 방치하면 치유되지 않고 오히려 덧나는데, 참으로 묘한 가학성이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어도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면 자리가 위태롭다. 고전의 덕목은 치유에 있으니까.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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