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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가게 할 끼다"라던 소년… 어떻게 추기경이 되었나

바람아님 2020. 4. 24. 08:09
조선일보   2020.04.23 03:00

[영화 리뷰] 저 산 너머
김수환 추기경의 유년 시절 다뤄… 정채봉 원작 바탕한 종교적 우화

옹기장이와 천주학쟁이. 도공(陶工)과 가톨릭 신자를 낮춰 부르는 두 단어는 고(故) 김수환(1922~2009) 추기경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열쇠다. 경북 군위의 김 추기경 가족은 조선 말기 서슬 푸른 천주교 박해를 피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움막을 짓고 옹기를 구웠던 독실한 가톨릭 신자 집안이다. 험하고 구석진 곳에서 차별과 핍박에 시달렸던 집안에서 태어난 그에게 낮은 곳에 임해서 높은 곳을 우러르는 사제직은 애당초 예정된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추기경의 아호도 '옹기'다.

30일 개봉하는 '저 산 너머'(감독 최종태)는 김 추기경의 유년 시절을 다룬 극 영화다. 엄혹한 일제강점기에 사제의 길을 결심한 추기경의 삶을 떠올리면 경건한 종교극이나 진중한 시대극을 연상하기 쉽다. 하지만 동화 작가 정채봉(1946~2001)의 원작에 바탕한 영화는 열두 살 신학교 예비과에 들어가기 이전의 소년 김수환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김수환 추기경의 유년 시절에 바탕한 극 영화 ‘저 산 너머’에서 소년 수환 역을 맡은 아역 배우 이경훈.
김수환 추기경의 유년 시절에 바탕한 극 영화 ‘저 산 너머’에서 소년 수환 역을 맡은 아역 배우 이경훈. /리틀빅픽처스
영화에서 김수환은 동네 과수원에서 친구들과 복숭아 서리를 하다가 들켜서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하는 철부지 막둥이다. 장터에서도 어머니의 치맛자락 붙잡은 손을 놓을 줄 모르는 소년이다.

어느 날 성당에서 사제 서품 미사에 참관한 어머니는 두 아들에게 사제의 길에 대해 넌지시 묻는다. 형 동한(김동한 신부·1919~1983)은 선뜻 어머니의 뜻을 따르겠다고 답변한다. 하지만 막내 수환은 "내는 인삼 가게 할 끼다"라는 엉뚱한 대답뿐이다.

실은 해수병(咳嗽病)으로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서 홀로 자식들을 키우는 어머니를 보살펴 드리겠다는 갸륵한 효심에서 나온 답이다. 하지만 수환의 말을 들은 어머니는 '마음 밭'의 비유를 들려준다. "천주(天主)님께서 요 마음 밭에 저마다의 씨앗을 묻어주신 것"이라는 이야기다. '마음 밭'과 씨앗은 소년 수환이 평생 풀어야 할 화두가 된다. 이때부터 영화는 소년 수환의 성장 드라마이자 종교적 우화로 변한다.

김수환 추기경이 열두 살에 성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에 입학했을 당시 사진.
김수환 추기경이 열두 살에 성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에 입학했을 당시 사진. /천주교 대구대교구

260대1의 오디션 경쟁률을 뚫고 소년 수환 역을 맡은 이경훈(10)을 비롯해 아역 배우들은 20일 시사회에서 극장 화면으로 자신의 연기를 처음 보면서도 연신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이들의 천진난만하고 자연스러운 연기 덕분에 스크린에서도 생동감이 가시질 않는다. 전남 구례와 전북 김제, 충남 논산 등 전국 각지의 자연경관을 담느라 촬영 기간만 8개월에 이르렀다.

"저기 저 산 너머에는 뭐가 있노?" 영화 제목은 소년 수환이 입버릇처럼 어머니에게 묻는 질문에서 가져왔다. '저 산 너머'에서는 소년의 '마음 밭'에 심어 놓은 신앙의 씨앗이 자라고 있을 것이다. 그 씨앗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날, 소년은 우리가 기억하는 추기경 김수환이 된다. 종교극에서 아동극까지 다양하게 변주되는 추기경의 삶을 보면, 거인은 그림자도 길다는 생각이 든다.


김성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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