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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1772년 79세의 나이로 다시 북한산성을 찾았다. 1712년 숙종과 함께 올랐던 날과 같은 4월 10일이었다. 선왕인 숙종을 기리기 위함이었다. 이번에는 창의문~대남문~행궁~대남문~창의문 코스였다. 영조는 총 세 차례 북한산성을 찾은 것이다. |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청나라 “해적 대비하라” 전갈에 6개월 만에 북한산성 쌓아 조선은 이미 임진왜란 직후부터 한양과 가까운 곳에 산성을 쌓을 필요성을 느꼈다. 북한산성 축조의 배경은 복합적이다. 1637년 병자호란을 치르고 청나라와 맺은 정축약조에는 ‘(조선은) 성지(城池)를 개축·신축하지 말 것’이라는 조항이 있었다. 게다가 붕당정치로 조정 내 찬반이 갈리면서 이후 80년 가까이 산성 축조는 실행하지 못했다. 한양의 인구는 1657년 8만명에서 1717년 19만명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이에 따라 17세기 후반 이후 사회 불안도 커지며 도성민들은 안위를 걱정하게 됐다. 정치적으로는 탕평책이 적용되면서 왕권 강화가 추진됐고, 이를 위해 군영 정비가 이뤄지면서 기존의 방위체계도 수도 외곽에서 도성으로 탈바꿈했다. 숙종은 임진왜란 때처럼 유사시 백성을 버릴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런 점에서 기존의 강화도와 남한산성은 문제가 있었다. 1710년, 청은 랴오둥반도 근처에서 해적이 출몰하자 조선에 ‘대비하라’는 전갈을 보냈다. 북한산성 축조 찬성파인 숙종은 탄력을 받았다. 근데, 신하들은 이번에도 찬반으로 갈렸다. 숙종은 결단을 내렸다. ‘왕이 말하기를 ‘계획은 비록 많더라도 결단은 혼자 하고자 한다. 도성 아주 가까운 곳에 이러한 천험의 땅이 있으니, 만약 지금 수축하지 않는다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하고 성을 쌓기로 결정하였다.’(조선왕조실록 숙종 37년) 이미 삼국시대부터 터가 다져진 까닭에 북한산성은 6개월 만에 속전속결 완성하게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