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에도, 정치에도, 코로나19에도 과학기술은 보이지 않네요."
취재 현장에서 만난 과학기술인들은 한결같이 요즘 상황을 이렇게 빗대곤 한다. 특히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갈수록 과학기술의 위상과 역할이 급격히 추락하고, 존재감 마저 사라지고 있다고 한탄 섞인 목소리를 자주 되풀이 한다. 과학기술이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면서 '과학기술 패싱'이 불거져 나오기도 한다.
코로나19 이후 전 세계가 한국을 방역모델 국가로 인정하며 손가락을 추켜 세우는 등 '대한민국 브랜드' 가치와 위상, 그리고 국민적 자부심은 최고로 높아졌다. 하지만, 과학적 합리성에 기반한 전문가 집단으로 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 활약해야 할 과학기술인은 철저히 소외되고, 관심조차 받지 못하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하고 있다.
올해 R&D(연구개발)에 투입되는 정부 예산만 24조 원. 전년 대비 무려 17%나 늘었다. 그러나 과학기술계가 체감하는 위상과 영향력은 오히려 예전보다 나아지지 않고 있다는 게 과학기술인들의 공통된 평가다. 그 단적인 예를 몇 가지 들어보자. 우선,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보여준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실종'을 꼽을 수 있다.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정부가 임시 조직으로 구성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과학기술 분야의 전담 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빠졌다. 이를 두고 과학기술계에선 "국가 재난 상황 시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무력함과 대한민국 과학기술인의 자괴감을 동시에 보여주는 부끄러운 자화상"이라고 꼬집었다. 물론 과학기술 역할과 중요성에 대한 정부의 인식이 떨어진 게 주요 원인이지만, 이렇게 될 때까지 그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과학기술계 스스로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동안 과학기술계는 '온실 속 화초'로 자라왔다.
4·15 총선에서도 여야 정당에 과학기술계는 안중에도 없었다. 각 당이 제시한 공약 중 과학기술 관련 내용은 사실상 없었다. 뿐만 아니라, 20대 총선 당시 과학기술인을 비례대표 1, 2번 등으로 전면에 내세워 우대했건만, 이번 총선은 달랐다. 그 결과, 21대 국회 입성에 성공한 과학기술인 출신은 위성정보 전문가인 조명희 미래한국당 비례대표 당선인 한 명 뿐이었다. 핵융합 전문가인 이경수 더불어시민당 후보와 원자력 전문가인 하재주 미래한국당 후보는 아쉽게도 당선권에 들지 못했다. 정치권에서도 과학기술은 철저히 무시당한 셈이다.
이 때문에 벌써부터 21대 국회에서 과학기술 분야 입법활동이 위축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나마 5선에 성공한 이상민(대전 유성을)·변재일(충북 청주 청원을) 민주당 의원이 유일하게 과학기술계를 대변할 수 있는 당선자로 활약이 예상될 뿐, '국회 내 과학기술 우군' 확보에 어려움이 예상된다.
과학기술에 대한 최고 지도자의 의지와 기대 역시 과학기술계를 실망스럽게 하고 있다. 지난 8일 열린 문재인 대통령 취임 3주년 특별연설에서 '과학기술' 단어는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22번 언급된 '경제'와 비교하면 사실상 존재감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대통령이 제시한 '방역 1등 국가', '안전한 대한민국', '경제위기 극복', '디지털 강국', '한국판 뉴딜', '국제협력', '인간안보' 등 주요 키워드와 연관된 단어로도 과학기술은 거론조차 안 됐다.
더욱이 남은 임기 2년의 국정 과제인 '국민과 함께 극복해 나가는 국난 극복'에도,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데'도, '세계를 선도하는 대한민국 길'을 열어 나가는 데도 과학기술의 역할론은 전혀 없었다. 코로나19 이후 펼쳐질 '뉴 노멀' 시대의 성패는 끊임없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진보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세계 각국은 과학기술에 국가적 역량을 집중하고, 과학기술인에 대한 예우와 대우, 지원도 아끼지 않고 있다. 예산을 얼마 지원했으니, 당장 성과를 내라고 과학기술인을 압박하지도 않는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3월 과학기술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과학기술은 인류가 전염병과 벌이는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다. 코로나19 사태 해결을 위해 과학기술계의 협조를 당부한다"고 과학기술계에 힘을 실어줬다. 국내 대표적 석학인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도 "우리가 직면해 있는 복합 위기 상황에서 뉴 노멀의 패권을 잡기 위해선 '국가 경영의 과학화'를 통한 국가 혁신체제를 다시 짜야 한다"고 과학적 합리성에 기반한 국정을 강조했다.
'화양연화(花樣年華)'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표현하는 말이다. 우리나라에 언제쯤 '과학기술의 화양연화'가 올까.
이준기기자 bongchu@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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