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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188] 버터

바람아님 2014. 4. 17. 11:26

(출처-조선일보 2012.11.07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프랑스 요리는 언제부터 그렇게 부드럽고 섬세한 맛을 내게 되었을까? 
천 년 전에도 프랑스인들은 그런 맛을 좋아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중세 시대에 후추를 많이 첨가한 귀족의 음식은 오늘날의 인도 음식보다 더 매웠고, 
또 매울수록 고급 음식으로 쳤다. 이런 매운 음식 대신 부드럽고 순한 맛 위주의 음식이 널리 퍼진 
것은 대체로 16세기 이후의 일이다. 그러니까 유럽 음식의 역사를 장기적 시각에서 정리하면 중세의 
매운맛에서 근대의 부드러운 맛으로 이행했고, 그 정점을 차지한 것이 18~19세기 프랑스 요리였다. 
이런 큰 흐름에서 핵심적인 사항은 버터의 확산이었다.

우리나라 사람이 서양 요리를 좋아하려면 결국 우리의 혀가 버터에 완전히 익숙해져서 버터가 
맛있다고 느껴야 한다. 서양 요리에서 버터는 마치 우리 음식에 들어가는 장(醬)과 같은 역할을 한다. 
외국인이 우리 음식에 맛을 들이려면 간장·고추장·된장에 익숙해져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요즘 서양풍 음식에 많이 익숙해진편이지만, 그래도 해외여행을 하다 보면 고향 음식이 얼마나 우리를 강하게 
지배하는지 깨닫게 된다.

원래 유목 민족이 개발한 버터는 일찍이 고대부터 농경 세계에 전해졌지만 오랫동안 유럽의 변방에서만 인기를 누렸다. 
14세기 후반에 나온 프랑스의 요리 책에도 버터가 사용된 레시피는 고작 2%에 불과했다. 이 당시 소스는 지방질이 거의 없고 
신맛과 매운맛이 강했다. 16세기에 가서야 버터가 남유럽에까지 많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후 사람들이 부드러운 맛을 
원하게 됨에 따라 그런 맛을 내는 음식 재료를 더 찾게 되고, 생산 구조도 여기에 맞춰 변화해 갔다. 
노르망디 지방에서 목축업이 확대되고 유제품 생산이 크게 늘어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어찌 보면 시시해 보이는 맛의 
추구라는 현상이 사실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중세에 사람들이 매운맛을 찾은 것이 동남아시아에서 중동지역을 거쳐 
지중해에 이르는 원거리 후추 교역을 발전시켰고, 근대에 부드러운 맛을 찾은 것이 농촌 세계에 큰 변화를 초래했다.

최근 한 학회에서 발표한 내용이다. 맛을 주제로 문학·역사학·사회학·영양학 전공자들, 동서양 요리의 대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활기찬 논의를 했다. 한 주제를 놓고 다양한 접근을 시도하니 많은 것을 배우고 신선한 영감을 주고받았다. 
모처럼 감칠맛 나는 모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