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2024. 1. 17. 07:50 수정 2024. 1. 17. 07:55
오늘 오후 서울에는 눈이 내릴 수 있다고 합니다. 시간을 낼수 있다면 선유도 공원에 가 보는 것을 추천드리며 이 글을 씁니다.
희미한 어둠 속에 야마하 그랜드 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다. 흑백의 건반을 비추는 동그란 조명이 보름달 같다. 그래서 그는 또 다른 세상으로 가기 전,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란 자서전을 남겼던 걸까.
지난달 국내 개봉한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는 세계적 음악 거장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1952∼2023)가 암 투병 중이던 2022년 9월에 촬영됐다(일찍이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해왔기에 그의 이름은 영어식으로 ‘류이치 사카모토’로 통하고 있다). 세상과 작별을 예감한 사카모토는 평생 만들어왔던 음악 중 20곡을 일주일의 촬영 동안 연주했다. 그 숭고한 모습을 아들 네오 소라 감독이 담았다.
선유도공원에서 왜 사카모토의 피아노가 떠올랐을까. 곰곰 생각하다가 ‘아하’ 싶었다. 검은 건반과 흰 건반을 오르내리는 사카모토의 구도(求道)적 손놀림이 선유도공원에 있는 ‘시간의 정원’을 연상시킨 것이다. 눈 덮인 시간의 정원 계단은 피아노 흰 건반 같았다. 부서질 뻔한 옛 정수장 건물은 그 자체로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인 셈이었다.
사카모토의 음악과 선유도공원은 풍화의 세월을 겪은 숭고미를 갖고 있다는 점,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전하는 점이 닮았다. 선유도공원 조경을 맡은 정영선 조경가는 말했었다. “용도 폐기된 정수시설을 부숴버리면 그 시절의 기억이 사라지기 때문에 옛것과 새것을 연결했다. 선유도공원은 마음이 쓸쓸한 사람들이 찾아왔으면 했다.”
쓸모가 다한 산업시설을 공원으로 부활시키는 발상의 전환은 제2, 제3의 선유도공원을 낳았다. 정수장을 활용한 서울숲(2005년 개장)과 서서울호수공원(2009년 개장), 철도 폐선을 활용한 경의선숲길(2012년 개장)…. 선유도공원에 서면, 특히 눈 오는 선유도공원에 서면 이런 생각이 든다. ‘폐허의 미학이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선유도공원에도 피아노가 있다. 야마하 그랜드 피아노는 아니어도 누구나 연주할 수 있게 야외에 둔 갈색의 업라이트 피아노다. 시간이라는 악보를 연주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 그 피아노를 보면서 마음속에 ‘상상의 풍경’을 그린다.
https://v.daum.net/v/20240117075056913
선유도공원에서 사카모토 류이치를 떠올리다[김선미의 시크릿가든]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상영중
Ryuichi Sakamoto | Opus, 2023
개요 일본다큐멘터리103분전체관람가
개봉 2023.12.27.
감독 네오 소라
관객수 48,976명예매 2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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