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에는 남자 넷이 등장하는데,
각각 하는 일이 다르다.
먼저 아래쪽을 보자. 아래의 오른쪽에 있는
남자는 넓은 잎사귀를 펼쳐서 다루고 있다.
그 아래에 차곡차곡 쌓인 것은 담뱃잎이다.
필자는 담배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어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지만,
위 그림이 담뱃잎을 가공하고 있는 것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위쪽을 보자. 위쪽 왼편의 사내는 작두로
장방형으로 생긴 물건을 가늘게 썰고 있다.
오른편의 사내는 작두질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 이 사내가 오른팔을 기대고 있는
커다란 나무 상자는 돈궤로 보인다.
물론 돈 이외의 다른 것을 넣기도 할 것이다.
작두 앞에는 둥근 물건과 삼각형 물건이
있는데 무엇인지 모르겠다.
작두로 썰고 있는 물건도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왼손으로 꽉 누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흔들리면 안 되는 물건이다.
추측건대 그림 아래쪽의 웃통을 벗은 사내가
차곡차곡 쌓은 담배를 작두로 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래쪽 왼편에 있는 탕건을 쓴 사내는
부채질을 하면서 책을 읽고 있다.
아마 소설 따위의 가벼운 책일 것이다.
●18세기 엽초전·절초전 상권 분쟁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은애전(恩愛傳)’에 참고할 만한 이야기가 있다.
강진현의 처녀 은애는 자신이 정조를 잃었다고 헛소문을 낸 노파를 죽인다.
이 사건을 보고 받은 정조는 은애를 정녀(貞女)라고 하면서 살려주고 이덕무에게 ‘은애전’을 짓게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은애가 아니고, 정조의 말이다.
옛날 어떤 사내가 종로 거리의 담배 가게에서
패사(稗史)를 읽는 것을 듣고 있다가 이야기가 영웅이
실의하는 곳에 이르자,
홀연 눈초리가 찢어지도록 눈을 크게 뜨고 입에서
거품을 내뿜다가 담배 써는 칼을 집어 들고 패사를
읽는 사람을 찔러 그 자리에서 죽이고 말았다.
패사는 곧 역사소설이다. 영웅인 주인공이 좌절하는
대목에 이르러 소설에 빠진 사내가 흥분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칼을 들어 소설을 읽어주는 사람을
찔러 죽이고 만 것이다.
정조는 아마도 이 사건을 심리했거나 아니면 관계되는
문서를 읽었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연히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담배 가게에서
소설을 읽었다는 것이다.
담배 가게는 약국과 함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조선후기 서울 시민의 카페와 같은 곳이었다.
여기서 고담(古談)을 하기도 하고 또 소설책을 읽기도 했다.
그림 위쪽의 돈궤에 기대어 있는 사내나 책을 읽고 있는 사내는 아마도 놀러 온 사람일 터이다.
담배를 썰어서 파는 곳을 절초전(切草廛)이라 한다.
조선 후기에 와서 담배가 널리 퍼지자, 조정에서는 담배 판매의 독점권을 갖는 엽초전의 개설을 허락하였다.
그 뒤 담뱃잎을 그냥 팔거나 큼직하게 잘라 파는 엽초전에서 담뱃잎을 사다가 피우기 좋도록 가늘게 썰어서 파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것은 엽초전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18세기 이래 엽초전과 절초전 사이에 상권을 둘러싼 분쟁이
시작되었고, 마침내 절초전도 국역(國役)을 담당하기로 하고 절초의 독점판매권을 얻었다.
하지만 뒤에 절초전의 절초 독점 판매권은 더 영세한 상인들이 절초를 파는 것을 막는다는 문제를 야기해 1742년 폐지된다.
그러다 1791년 육의전(六矣廛) 이외 모든 시전의 금난전권(禁亂廛權)을 없앤 신해통공으로 인하여 다시 담배를 썰어 파는
가게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위 그림은 아마도 신해통공 이후의 사정을 반영한 것일 터이다.
●송시열은 금연론자… 정조·정약용은 골초
담배는 17세기 초에 들어온 것이다.
‘인조실록’ 16년(1638) 8월 4일조를 보면, 우리나라 사람이 몰래 담배를 심양에 보냈다가 청나라 장수에게 발각되어 크게
힐책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는 병자호란(1636)으로부터 불과 2년 뒤이고, 소현세자를 비롯한 많은 조선 사람들이
심양에 억류되어 있을 때였다. 이 당시 심양의 청나라 사람도 담배를 좋아해 뇌물로 가져갔던 것인데, 청 태종이 담배의
중독성에 주목해 금지하였으므로 담배를 가지고 간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날의 기사를 보자.
이 풀은 병진년(1616)·정사년(1617) 어림에 바다를 건너 들어왔다.
피우는 사람은 있었지만 그리 성행한 것은 아니었는데, 신유년(1621)·임술년(1622) 이래로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다.
위의 기록에서 보듯 담배는 1616년에서 1617년 사이에 처음 전래되었고, 불과 5년 뒤인 1621·1622년간이면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퍼졌던 것이다.‘인조실록’ 6년(1628) 8월19일조에 광주(廣州)의 선비 이오(李晤)의 응지 상소를 보면 정묘호란
이후 조정에서는 청나라의 공격에 대한 대비책은 세우지 않고 “여러 신하들이 비변사에 모여 농담이나 지껄이고 담배만 피울 뿐”
이라고 비판하고 있는바,1628년이면 이미 담배가 조정의 관료들 사이에도 널리 유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담배에 관한 문헌은 무수하게 많다. 그 문헌들은 대개 두 가지로 갈린다.
담배 유해론과 담배 유익론이다. 담배가 유해하다는 것은 그것의 중독성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명인들 역시 담배에 관해 서로 의견이 갈린다. 대동법을 만들었던 명재상 김육, 고문의 명인이었던 이식, 그리고
설명이 필요 없는 인물인 송시열은 모두 담배를 싫어한 금연론자였고,
역시 고문의 대가였던 장유,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 군주인 정조, 그리고 정조를 능가하는 학문의 태두 정약용은 담배
유익론자이자 골초였다.
이들이 남긴 담배에 관한 글을 읽어보면 요즘과 다를 바 없다. 건강에 나쁘고 냄새가 심하게 난다는 것이 담배 유해론자의 견해이고, 그럴 수도 있지만 심화(心火), 곧 스트레스를 다스리기에 담배가 인간에게 이롭다는 것이 담배 유익론자의 견해다.
●흡연도구 전문적으로 파는 가게까지
담배의 해로움이 널리 퍼지고, 또 조정에서 이따금 담배 금지령을 내리기는 했지만, 담배는 17세기 이래 일상에서 없앨 수 없는
필수적 기호품이 되었다. 서울 시전에는 절초전만 생긴 것이 아니라, 흡연도구를 전문적으로 파는 가게까지 등장했던 것이다.
‘동국여지비고’란 책을 보면, 군기시와 약현의 연죽전(煙竹廛)에서는 여러 가지 색으로 물들인 담뱃대와 담배통을 팔았고,
종로의 도자전(刀子廛)에서는 장도, 은비녀, 부인네의 패물, 금은 가락지와 함께 담배통을 팔았다고 한다.
이교익(1807∼?)의 작품 ‘쉴 때 피우는 담배 한 모금’에서처럼 심심하면 손이 가는 것이 담배다.
담배 역시 일종의 ‘마약’이다. 담배의 중독을 이덕무는 ‘한죽당섭필’에서 아주 흥미롭게 그리고 있다.
우연히 여러 사람과 각각 좋아하는 것을 말하였다. 한 사람이 말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담배·술·고기 셋이지요.“
내가 물었다.
“만약 다 갖추지 못한다면 어떤 것을 빼겠는가?”
“먼저 술을 빼고, 다음에 고기를 뺄 겁니다.”
내가 그 다음 뺄 것을 묻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담배를 뺀다면 산들 무슨 재미가 있겠소.”
담배가 없다면 살아 있어도 재미가 없다는 말은, 사실 흡연이 쾌락을 유발하는 수단이며,
동시에 담배의 중독 상태를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필자는 건강상 문제로 담배를 끊었지만, 몇 년 전까지는 골초 중의 골초였다.
아침 6시부터 10시까지 한 갑,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한 갑, 그리고 오후 6시부터 잠들 때까지 한 갑,
이렇게 하루에 세 갑을 피웠다.
집에도, 연구실에도, 들고 다니는 가방에도 여러 종류의 담배가 늘 구비(?)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의 문헌을 읽다가도 담배에 관한 기록이 나오면 모아 두었다.
만약 건강이 허락된다면 다시 그 향기를 맡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