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아트칼럼 1374

고요함을 그린 과묵했던 화가는 목소리 잃는 후두암으로 떠났다

조선일보 2023. 9. 15. 03:01 [명작 속 의학] [77] 빌헬름 하메르스회이 덴마크 화가 빌헬름 함메르쇼이(1864~1927년)는 실내와 뒷모습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코펜하겐에 위치한 스트란가드 30번지(Strandgade 30)에 작업실을 차리고, 집 안 풍광과 사람 뒷모습을 소재로 60개 이상의 그림을 그렸다. 작품 제목에 스트란가드30이 나오는 이유다. 그가 37세에 그린 은 아파트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묘사했다. 그에게 창문은 세상과 접하는 통로다.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은 등을 돌리고 있고, 기둥처럼 아무런 움직임도 없다. 어떤 표정인지 알 수 없다. 여인과 덮개가 열려 있는 피아노는 마치 실내 가구처럼 보인다. 미국의 정신의학자는 미국의사협회지에 함메르쇼이 작품에 대한..

외할머니의 가르침대로[이은화의 미술시간]〈284〉

동아일보 2023. 9. 13. 23:36 서구 문화권에서 검은 고양이는 불운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세실리아 보는 ‘시타와 사리타’(1921년·사진)에서 검은 고양이를 주인공처럼 그렸다. 고양이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자 어깨에 올라서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화가는 왜 하필 검은 고양이를 그려 넣은 걸까? 18세 때부터 미술 강사를 했고, 펜실베이니아 미술아카데미 졸업 후에는 초상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파리 유학을 통해 인상주의를 배웠지만 자신만의 사실주의를 고수했고, 40세에 모교 최초의 여성 교수로 임명됐다. 검은 고양이는 에두아르 마네가 그린 악명 높은 ‘올랭피아’를 연상시킨다. 정면을 당당히 응시하는 벌거벗은 매춘부와 꼬리를 치켜든 검은 고양이의 성적인 암시 때문에 논란이 됐던 작품이다...

밀밭을 그린 이유[이은화의 미술시간]〈283〉

동아일보 2023. 9. 6. 23:33 1889년 9월 초, 빈센트 반 고흐는 ‘수확하는 사람이 있는 밀밭’(사진)을 그렸다. 생레미에 있는 정신병원에 자발적으로 입원한 지 넉 달이 지날 무렵이었다. 밖으로 나가는 게 금지되었기에 고흐는 병실 철창을 통해 바라본 풍경을 그렸다. 특히 황금빛 밀밭에 마음이 끌렸다. 병원에 머문 1년 동안 13점 넘게 밀밭 풍경화를 완성했다. 화면에는 뙤약볕 아래서 농부가 온 힘을 다해 밀을 수확하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노란 밀밭은 푸른 색조로 칠해진 마을과 울타리로 완전히 분리됐다. 이는 정신질환으로 세상과 단절된 자신의 처지를 투영한 것으로 보인다. 고흐는 보일 듯 말 듯 작게 그려 넣은 농부를 죽음의 이미지로 여겼다. 동생 테오한테 보낸 편지에 썼듯이, 농부가 베어..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495] 피카소와 오펜하이머

조선일보 2023. 9. 5. 03:03 여인의 초상화다. 민트색 얼굴에 높이가 다른 두 눈이 제각각 옆과 앞을 향해 있다. 얼굴을 지나가는 청록색 세로선은 뒷면의 벽 장식과 연결된다. 팔짱을 낀 것 같기는 한데 풍만한 가슴 아래 손가락이 양옆으로 나와 있으니 도대체 이 여인의 몸이 어떻게 뒤틀린 건지 알 수가 없다. 제멋대로 던져 둔 퍼즐 조각처럼 뒤죽박죽인 이 그림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가 연인이던 마리 테레즈 월터를 모델로 그린 것이다. 피카소는 수세기 동안 서양 미술의 황금률처럼 지켜졌던 원근법을 산산이 깨뜨렸다. 원근법을 무시하고 나니 연인의 눈, 코, 입을 하나씩 떼어 앞, 뒤, 옆, 위 어디서도 볼 수 있다. 이처럼 종전 틀을 깨고, 세상의 이면을 보며,..

“내 딸이 얼어죽을뻔 했어!” 식은 욕조에 女모델 뒀다가 소송갈 뻔한 사연[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존 에버렛 밀레이 편]

헤럴드경제 2023. 9. 2. 00:22 오필리아 부모 집에 있는 그리스도 눈먼 소녀 편집자주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사랑을 잃고 실성한 소녀 오필리아는 실성했다. 산발이 된 그녀는 매일 숲속 골짜기를 쏘다녔다. 웃고, 울고, 노래를 부르..

결함 있는 위인들[이은화의 미술시간]〈282〉

동아일보 2023. 8. 30. 23:42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전기 영화 ‘오펜하이머’에는 파블로 피카소의 입체파 그림이 등장한다. 화가의 젊은 연인 마리테레즈 발테르를 그린 ‘팔짱을 끼고 앉은 여인’(1937년·사진)은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훗날 실현한 핵폭탄 구상에 영감을 주는 것으로 묘사된다. 실제로도 오펜하이머는 피카소 예술에 영감을 받았을까? 오펜하이머의 전기 작가 카이 버드와 마틴 셔윈에 따르면, 오펜하이머의 부모는 뉴욕의 큰 아파트에 많은 그림을 소장하고 있었다. 여기엔 피카소의 청색시대 그림인 ‘어머니와 아이’도 포함된다. 피카소 외에도 렘브란트 판레인, 빈센트 반 고흐,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등 시대를 앞선 예술가들의 작품을 오펜하이머는 어린 시절부터 보고 자랐다. 놀런 감독의 영화..

[미술로 보는 세상] '먼저 생각하는 사람', '먼저 생각하는 땅'

연합뉴스 2023. 8. 26. 09:00 미국은 낙원의 땅일까? 개척의 대지일까? 미지의 존재일까? 현재 이야기가 아니다. 미국이라는 신대륙이 하나하나 정복되던 19세기 초의 드라마를 말하는 것이다. 대지와 사람과 인식의 한계를 이겨내던 그 열정과 죽음과 도전의 시대. 토머스 콜(1801~1848)은 미국 '허드슨 화파' 창시자다. 미국 동부를 가로지르던 허드슨강의 신비로운 젖줄에 감화해 광활한 미국 자연을 주로 그린 화가다. 그가 그린 미국은 장엄하다. 신비롭다. 숭고하다. 그가 숱하게 찾아 나선 대륙 풍경의 대표작은 '멀리서 본 나이아가라 폭포'(1830)다. https://v.daum.net/v/20230826090007638 [미술로 보는 세상] '먼저 생각하는 사람', '먼저 생각하는 땅' [..

추악한 인생 그린 연작 판화, 최초의 미술 저작권법 만들다 [송주영의 맛있게 그림보기]

한국일보 2023. 8. 22. 04:32 그림 보호 재판 청구, 저작권 인정 시초 편집자주 아무리 유명한 예술작품도 나에게 의미가 없다면 텅 빈 감상에 그칩니다. 한 장의 그림이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맛있게 그림보기는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그림 이야기입니다. 미술교육자 송주영이 안내합니다. ‘막장드라마’라고 하면 불륜, 패륜, 출생의 비밀, 불법사기 등 온갖 비윤리적인 사건들이 개연성 없이 소란스럽게 펼쳐지는 TV드라마가 생각난다. 원래 ‘막장’은 석탄 광산의 맨 끝부분을 뜻한다. 더는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벽이 막장이다......서양미술사에서 예술로 인정받는 ‘막장드라마’가 있다. 영국 18세기 화가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garth)의 연작 시리즈들이다. 호가스는 최초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