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아트칼럼 1373

화가가 된 의학도[이은화의 미술시간]〈286〉

동아일보 2023. 9. 27. 23:30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모라면 똑같은 마음일 게다. 자식이 사회적 존경과 안정된 수입을 보장받는 전문직 종사자가 되길 바라는 것 말이다. 한국에서 의대 열풍이 거센 것도 그 때문일 터. 19세기 프랑스 화가 프레데리크 바지유도 부모님의 바람 때문에 의대에 진학했다. 그러나 의사 시험에 낙방하는 바람에 자신이 원하던 화가가 되었다. 부유한 환경에서 나고 자란 바지유는 이타심도 강했다. 클로드 모네나 오귀스트 르누아르 같은 가난한 화가 친구들의 후원자를 자처했다. 26세 때 그린 ‘가족 모임(1867∼1868년·사진)’은 그가 얼마나 유복한 집안 출신인지를 보여준다. 맑은 여름날 오후, 부모님 집 야외 테라스에 가까운 친인척들이 모여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498] 햇빛 냄새 나는 빨래

조선일보 2023. 9. 26. 03:03 수정 2023. 9. 26. 05:30 맑고 쨍한 가을 햇볕에 옥양목 이불을 널어 말리면 며칠 동안 잠자리에서 햇빛 냄새가 났다. 미국을 대표하는 화가 앤드루 와이어스(Andrew Wyeth·1917~2009)가 이 그림을 그렸을 때도 틀림없이 태양 아래 바싹 말린 이불의 냄새와 촉감을 떠올렸을 것이다. 초목이 짙푸른 늦여름, 해가 좋은 날 빨래 한 바구니를 널어 두자, 기다렸다는 듯 그 아래서 개가 잠들었다. 가벼운 바람에 빨래가 퍼덕이고, 따뜻한 햇살에 달궈진 비누 냄새가 주위로 퍼지면, 개가 아니라 사람이라도 쉽게 잠이 들 것이다. 실제로 사실적인 앤드루의 회화는 추상화를 높이 사던 평론가들 눈에 늘 이류였다. 그럼에도 와이어스는 미술의 중심지인 뉴욕을 탐..

“도저히 못참겠어” 봉인 푼 그녀, 외마디 비명…惡은 그렇게 쏟아졌다[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판도라 편]

헤럴드경제 2023. 9. 23. 00:21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쥘 조제프 르페브르 월터 크레인 편집자주 〈후암동 미술관〉은 그간 인간의 세계를 담은 예술에 초점을 맞춰왔습니다. 이제 시간을 크게 앞당겨 신의 세계를 살펴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부터 명화와 함께 읽어봅니다. 기사는 여러 참고 문헌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그녀는 찬장 안쪽 깊이 숨긴 항아리를 꺼내왔다. 판도라는 심호흡을 했다. "아주 잠깐만 열어서 무엇이 있는지만 보고 닫으면 돼." 19세기 네덜란드 화가 로렌스 앨마 태디마는 잔뜩 기대에 찬 판도라가 항아리를 응시하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어린아이 같은 표정의 그녀는 곧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듯하다. 비슷한 시기 영국 화가 존 윌리..

모순된 인생 [이은화의 미술시간]〈285〉

동아일보 2023. 9. 20. 23:18 수정 2023. 9. 21. 04:49 13세기 이탈리아 최고의 시인 단테는 베아트리체와의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유명하다. 단테는 아홉 살 때 여덟 살 베아트리체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베아트리체를 천사와 같이 순결한 존재로 여겼기에 평생 가슴에 품고 살며 문학적 영감을 얻었다. 단테를 흠모했던 19세기 영국 화가 단테이 게이브리얼 로세티는 자신의 아내 엘리자베스 시달을 베아트리체에 비유해 그렸다. ‘축복받는 베아트리체’(1864∼1870·사진)에서 시달은 두 눈을 감고 황홀경에 빠진 듯한 모습이다. 붉은 비둘기가 양귀비꽃을 물고 와 그녀의 두 손에 떨어뜨리려 하고, 배경에는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만나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로세티는 시달과 사귄 지 10년 만에 결..

[김한수의 오마이갓]갓 쓴 예수, 도깨비 사탄, 표주박 세례...김기창 ‘예수의 생애’

조선일보 2023. 9. 20. 00:10 70년 전 운보가 그린 ‘예수의 생애’ 30점 연작에 소강석 목사 해설 붙인 성화집 나와 이 그림들은 한국화의 대가 운보 김기창(金基昶·1913~2001) 화백의 ‘예수의 생애’ 연작 작품들입니다. 운보의 이 연작은 유명하지요. 김기창 화백은 알려진 대로 청각장애인이었죠. 일곱 살 때 열병을 앓은 후 청력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천재적 소질을 타고난 그는 부단한 노력을 더해 현대 한국화를 대표하는 화가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끊임없는 자기 혁신을 통해 거듭 새로운 화풍(畵風)을 선보였지요. 화면 전체에서 역동적인 기운이 느껴지는 달리는 말 그림을 비롯해 ‘바보산수’ ‘청록산수’ 등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의 생애’를 그림 30점으로 그렸습니다...

"나랑 결혼할래 죽을래"…'스토커 그녀' 저지른 일이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한국경제 2023. 9. 16. 09:09 수정 2023. 9. 16. 16:14 노르웨이 '국민 화가' 에드바르 뭉크(1863~1944) 가족의 죽음, 실패한 사랑들 그 고통과 극복의 이야기 처음엔 분명 사랑이었습니다. 분명히 그랬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됐던 걸까요. 그녀와 남자는 한때 서로 사랑했습니다. 그녀는 결혼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하지만 남자는 결혼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어느새 그녀의 사랑은 집착으로 변했습니다. 그녀는 남자의 친구들에게 접근해 환심을 산 뒤 이를 이용해 남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손바닥 보듯 환히 들여다봤습니다. 남자가 다른 도시로 도망가면 그녀는 곧바로 뒤를 따랐고, “따라오지 말라, 네가 싫다”고 하자 남자의 숙소가 있는 곳의 옆 마을에 묵으며 “보고 싶다, 결혼하자”는 편..

“그녀 남친을 제가 죽였어요” 짝사랑 훔쳐보던 괴물, 무슨 짓을 벌였나[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오딜롱 르동 편]

헤럴드경제 2023. 9. 16. 00:22 키클롭스 감은 눈 흰 꽃병과 꽃 편집자주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외로운 괴물 폴리페모스는 키클롭스(하나의 눈을 가진 거신) 무리 중 가장 세고 사나웠다. 그는 외모부터 무서웠다. 이마 한가운데 박..

고요함을 그린 과묵했던 화가는 목소리 잃는 후두암으로 떠났다

조선일보 2023. 9. 15. 03:01 [명작 속 의학] [77] 빌헬름 하메르스회이 덴마크 화가 빌헬름 함메르쇼이(1864~1927년)는 실내와 뒷모습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코펜하겐에 위치한 스트란가드 30번지(Strandgade 30)에 작업실을 차리고, 집 안 풍광과 사람 뒷모습을 소재로 60개 이상의 그림을 그렸다. 작품 제목에 스트란가드30이 나오는 이유다. 그가 37세에 그린 은 아파트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묘사했다. 그에게 창문은 세상과 접하는 통로다.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은 등을 돌리고 있고, 기둥처럼 아무런 움직임도 없다. 어떤 표정인지 알 수 없다. 여인과 덮개가 열려 있는 피아노는 마치 실내 가구처럼 보인다. 미국의 정신의학자는 미국의사협회지에 함메르쇼이 작품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