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아트칼럼 1373

미성숙한 중년[이은화의 미술시간]〈279〉

동아일보 2023. 8. 9. 23:45 사과 정물화로 유명한 폴 세잔은 1870년대 중반부터 야외에서 수영하거나 목욕하는 사람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목욕하는 사람’(1885년·사진)도 그중 하나다. 한여름 대낮, 속옷만 입은 소년이 얕은 물웅덩이에 발을 담그고 있다. 그는 더위를 식혀줄 물속에서 오히려 의기소침해 보인다. 화가는 소년을 왜 이런 모습으로 그린 걸까? 사실 이 그림은 19세기 전통 미술 관점에서 보면 엉망진창이다. 젊은 남성을 그릴 때, 근육질 몸매와 이상적인 비율을 강조하던 관습을 완전히 깬다. 소년은 두 손을 엉덩이에 얹고 눈을 내리깐 채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사랑에 실패하고 경제적 자립도 못 한 미성숙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것일 터. 이 그림이 중년 세잔의 우울한 자화상으..

"네 아들 때문에 내 딸이 죽었다"…둘도 없던 형제의 비극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한국경제 2023. 8. 5. 08:56 수정 2023. 8. 5. 09:27 '인상주의 개척자' 클로드 모네 버팀목 돼 준 두 사람이 없었다면 위대한 명작들도 없었다 그가 사랑하고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 “니 아들놈이 내 딸에게 병을 옮겼다. 네 아들이 내 딸을 죽인 거나 다름없다는 말이다.” 분노와 절망을 애써 억누르며, 형은 동생에게 한마디 한마디 꼭꼭 씹어 뱉듯 말했습니다. 공장을 운영하는 형은 늘 동생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돼 주며 물심양면으로 도움이 돼줬습니다. 동생의 아들을 자신의 공장에 취직시켜 준 것도 그런 도움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동생의 아들은 어디선가 의문의 병을 얻어왔고, 공장 직원들에게 그 병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귀한 딸까지 병에 옮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동생의 아들이 ..

“여자랑 사느니 맹수랑 살겠다” 아내앞서 폭언…‘전쟁같은 사랑’을 한 부부[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에드워드 호퍼 편]

헤럴드경제 2023. 8. 5. 00:22 고독의 화가 불모지 철길 옆집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햇빛 속의 여인 편집자주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여졌습니다. 호퍼는 1882년 미국 뉴욕주(州) 나이액 내 중산층 집안에서 출생했다. 어릴 적 호퍼는 잡화점..

안목과 선의[이은화의 미술시간]〈278〉

동아일보 2023. 8. 2. 23:33 더운 여름에는 시원한 바다나 강으로 떠나고 싶어진다. 인상파 화가 메리 커샛도 여름이면 지중해 연안의 휴양도시 앙티브로 떠나곤 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뱃놀이 일행’(1893∼1894·사진)도 앙티브의 바다를 배경으로 그려졌다. 커샛은 미국인이었지만 파리에 정착해 살며 인상파 그룹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이 그림은 49세 때 그린 것으로, 보트를 탄 젊은 엄마와 아이를 묘사하고 있다. 엄마는 하늘색 맞춤 정장을 입고, 머리에는 꽃장식이 달린 챙 넓은 모자를 썼다. 분홍 드레스를 입은 아이의 성별은 알 수 없다. 당시 관행에 따라 어린 남자아이도 드레스를 입었기 때문이다. 이들과 마주 앉은 뱃사공은 힘차게 노를 젓고 있다. 아이를 안은 엄마는 배의 움직임에 몸..

남편이 그린 아내 그림 보고 반한 연하남…불륜의 결말은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한국경제 2023. 7. 29. 08:16 수정 2023. 7. 29. 13:11 덴마크 대표 자연주의 화가 페데르 세베린 크뢰위에르 비참한 출생, 성공, 그리고 배신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 남자의 이름은 노르웨이 태생의 덴마크 화가 페데르 세베린 크뢰위에르(1851~1909). 최근 몇 년 새 재조명 움직임이 일고 있는 자연주의 화가입니다. 오늘은 크뢰위에르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의 아름다운 작품들과 함께 소개합니다. 크뢰위에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본 광경은 낡은 정신병원 천장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노르웨이의 한 정신병원에 입원 중이었기 때문입니다.....다행히도 이모 부부가 크뢰위에르를 맡아 줬습니다. 이모는 크뢰위에르를 아껴 줬습니다. 문제는 지나치게 아꼈다는 겁니다. 이모는 소년이 조금이..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489] 피카소를 버린 여인

조선일보 2023. 7. 25. 03:03 올해 6월, 프랑스 화가 프랑수아즈 질로(Francoise Gilot·1921~2023)가 10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삶을 영화로 만들면 길기는 해도 지루할 틈은 없을 것이다. 질로는 변호사가 되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과 대학에 다니면서 몰래 그림을 그리다 21세에 파리 유명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즈음 마흔 살 연상의 피카소를 만났다. 당시 피카소에게는 아내와 여러 애인이 있었지만, 함께 두 아이를 낳고 평범한 가족처럼 산 사람은 질로였다. 그러나 질로는 10년 동안 한결같이 다른 여자를 탐하던 피카소와 헤어지기로 결심했다. 수많은 피카소의 여자 중 그에게 이별 통보를 한 건 질로가 유일했다. 피카소는 그녀의 앞길을 막으려고 안간힘을 ..

'전 여친과의 딸', 결혼 35년간 숨긴 남자…속사정 봤더니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한국경제 2023. 7. 22. 07:46 수정 2023. 7. 22. 08:14 '행복의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 삶을 덮치는 아픔 견디며 따뜻한 행복만 그림에 담았다 르누아르의 삶과 작품 이야기 1881년 프랑스 파리 근교의 샤투 섬. 따사로운 햇살 아래, 한 화가가 능숙한 솜씨로 젊은 여성과 아이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습니다. 보기만 해도 미소가 저절로 떠오르는 아름다운 광경,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하지만 부드럽고 화사한 그림과 달리 화가의 마음은 소용돌이치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모습에서 오래 전 가난 때문에 곁을 떠나야 했던 연인과 딸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성공한 화가였더라면, 돈을 잘 벌었더라면. 그랬다면 그녀와 내 귀여운 딸도 지금 이들처럼 환하게 웃으며 내 앞에 앉아있었을 텐데..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488] 윈슬로 호머의 해변 풍경

조선일보 2023. 7. 18. 03:02 .....시끌벅적한 무리에서 한 발자국 물러서서 멀뚱히 서있는 여자아이가 있다. 옷과 색을 맞춘 빨간 리본으로 머리를 곱게 단장하고 타이즈에 부츠를 신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물놀이를 하고는 싶은데 맨발에 끈적끈적한 바닷물과 모래를 묻힌 그 다음의 뒤치다꺼리를 생각하니 엄두가 안 나는 모양이다. 그저 뒷모습일 뿐인데 복잡한 그 심사가 느껴지는 건 화가 윈슬로 호머(Winslow Homer·1836~1910)의 뛰어난 묘사력 덕분이다. 호머는 19세기 말 미국의 사실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다. 정식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으나 아마추어 화가였던 어머니에게 재능을 물려받았다. 사실 이 그림은 더 큰 작품의 일부였는데, 한 평론가의 심한 악평을 들은 뒤 호머가 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