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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희영 칼럼] 'AIIB 열차' 타지 못한 美·日을 비웃는가

바람아님 2015. 4. 6. 10:08

(출처-조선일보 2015.04.06 송희영 주필)

中 주도에 쓴맛 다시는 미국, 70년 전 帝國 위세 과시하다 패권 뺏긴 영국 떠올리게 해
위기 느낀 일본은 참여 암시, 中 경제력 아직 美 압도 못해… 한국 가입 축복 여기긴 일러


	송희영 주필 사진

지난주 도쿄에서 열린 한·중·일 3국 세미나에서 만난 일본인들은 심란한 반응을 보였다. 

중국이 추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의 여진(餘震)이 거셌다. 56개 국가가 중국 쪽에 줄을 섰다. 

"한국은 물론 호주·영국까지 가입한 것이 (일본에는) 아프다." 어느 국회의원의 소감이다. 

"영국이 미국의 반대를 뿌리쳤다는 게 중요하다." 

국제 모임에서 미국·일본만 외롭게 남아 있는 상황은 처음 겪는다고 했다.

아소 다로(麻生太郞) 재무성 대신은 "일본에 마이너스는 아니다"고 애써 변명했다. 

경제계가 AIIB에 참가하지 않은 것을 지적하자 "ADB(아시아개발은행)가 발주하는 공사 가운데 

일본 기업이 수주하는 사업은 0.5%밖에 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중국 기업들이 ADB 발주 사업을 20% 이상 수주하는 

마당에 AIIB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서 손해 볼 것도 별로 없다는 말이었다.

하필 아소의 발언이 나온 다음 날 도요타자동차는 중국 광저우에 연간 10만대 생산 규모의 소형 자동차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내실(內實)을 다지겠다며 공장을 늘리지 않던 방침을 5년 만에 뒤집은 결정이다. 

정부는 중국을 멀리하지만 도요타는 중국에 더 파고들겠다고 선언한 꼴이 됐다.

누군가는 미국과 일본이 이번에 '실수했다'고 했다. 다른 사람은 '실패했다'고 했다. 

하지만 "실수도, 실패도 아닌 패배(敗北)라고 봐야 한다"고 말한 경제인이 더 솔직해 보였다. 

미·일 연합군이 중국과의 줄다리기에서 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 편에 선 한국이 더 미워진 것일까. 

일본 언론에는 '한국이 위안화에 푹 빠졌다'며 한국이 미국과 이혼하고 중국 품에 안긴 '종중(從中)'의 국가가 된 것처럼 

해설한 전문가도 등장했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다. 

일본 외교관은 "(일본이 AIIB에) 끝까지 참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게 됐다"는 이중 부정(否定)으로 언젠가 참여할 것을 

암시했다. 다른 국회의원은 "아베 총리가 미국에 다녀온 후 결정할 것"이라고 점쳤다. 

일본 언론들도 '가입 안 한다'는 말 대신 '참가를 미뤘다'고 보도하기 시작했다.

패권(覇權)이 교차하는 시대마다 익숙한 풍경이 있다. 환호성을 올리는 나라가 있으면 쓰디쓴 입맛을 다시는 나라가 있다. 

달러 패권 시대가 시작된 때의 모습도 지금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당시 신흥 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은 주먹을 불끈 쥐었던 반면 해가 지는 나라 영국은 오늘의 일본처럼 심란하고 어수선했다.

1944년 미국 브레턴우즈에서 열린 국제회의에는 44개국 대표들이 모였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이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모든 나라가 자기 나라 통화 가치를 낮추는 금융 전쟁이 한창이었다. 브레턴우즈 회담은 

이런 통화 전쟁을 멈추자는 취지에서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의 설립에 대한 큰 그림이 그려졌다.

그곳에 영국 대표단을 이끌고 나타난 사람은 당대 최고의 경제학자로 꼽히던 케인스였다. 

미국을 대표하는 경제학자는 해리 화이트였다. 화이트는 가업(家業)과 교수직을 오락가락하다 겨우 장관 보좌관을 맡은 

무명(無名) 인사였다. 미국 신문들은 회담장 분위기를 '영국인에 지배당하는 미국인들'이라고 했고, 화이트를 '영국인들에게 

완전히 복종하는 인간'으로 묘사했다.

회담 결과는 무명 학자의 승리였다. 케인스는 정교한 이론을 앞세워 새로운 국제 통화를 창설할 것을 주장했지만 

화이트는 달러를 세계의 기준 통화로 만들겠다는 집념을 불태웠다. 화이트는 작은 나라들을 배려해 미국이 낮은 이자율로 

차관을 제공하겠다는 사탕발림 약속을 덧붙였다. 케인스는 대영제국의 위세를 과시하며 자기 논리를 고집하는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케인스의 오만함과 화이트의 세심한 접근 방식이 회담 분위기를 갈랐다.

영국이 통화 패권을 미국에 넘겨준 결정타는 결국 두 나라 경제력의 격차였다. 

전쟁으로 국고(國庫)가 말라버린 영국은 미국에 손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콧대 높던 케인스는 IMF와 IBRD 설립에 찬성하는 대신 미국에서 원조를 받기 위한 협상에 나서야 했다. 

IMF와 IBRD를 런던에 두려던 계획도 포기해야 했다. 

그는 굴욕적인 원조 차관 협상을 다 끝내지 못한 채 쓰러졌다. 

AIIB를 우습게 본 미·일을 보며 우리는 케인스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오늘의 미국은 70년 전의 영국만큼 처참한 것은 아니다. 

중국의 경제력이 미국을 압도하는 수준에 다다르지도 못했다. 

내부에 쌓인 부실(不實)이 너무 많아 시진핑 정권의 개혁이 잘못되면 나라 전체가 주저앉을 수 있다. 

미국이 마음만 먹으면 중국에 한판 승부수를 던질 여지는 얼마든지 남아 있다.

미국·일본이 AIIB 문제로 체면을 구겼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을 비웃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일본보다 먼저 가입한 것을 큰 축복이라도 받은 듯 뿌듯해하거나 자랑할 일도 못된다. 

위안화(貨)가 제왕(帝王) 자리에 들어서기까지는 가야 할 길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