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전시·공연

궁궐이라는 캔버스에… 民畵를 색칠하다

바람아님 2015. 6. 8. 11:34

(출처-조선일보 2015.06.08 허윤희 기자)

[고궁보월展 여는 화가 사석원]

궁궐 속 조선 역사 관심, 10년간 답사

문예 부흥기 이끈 정조를 사슴으로 근대화 꿈꿨던 고종을 호랑이로 표현
원색에 소나무 등 민화적 상상 더해


	화가 사석원.
/이태경 기자
화가 사석원(55·사진)에게 궁궐은 운명적인 장소다. 
1976년 봄, 고등학생 사석원은 경복궁 향원정 앞에서 소나무를 그리고 있었다. 
그림 속 이파리 위로 잠자리가 살포시 내려앉았다. 
지나가던 학생들이 외쳤다. "야, 솔거다 솔거!" 
그는 "화가가 될까 말까 고민 중이었는데 그때 처음 미대에 가기로 결심하고 
미술학원에 등록했다"고 했다.

나이가 들면서 궁에 대한 관심은 더 깊어졌다. 눈 오는 창덕궁, 비 오는 향원정이 좋았다. 
사석원은 10여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궁궐 답사를 다녔다. 
처음엔 경치에 반했고 차츰 역사가 궁금해졌다. 
만발한 꽃이며 전각의 우뚝한 몸뚱어리며 배경으로 물러나 앉은 산수(山水)며, 
하나같이 아름답지만 조선 역사의 상처와 질곡이 그곳에 어리비쳤다. 
그는 조선왕조실록을 뒤지고 닥치는 대로 자료를 찾아 읽었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12일 개막하는 개인전 '고궁보월(古宮步月)-옛 궁에서 달의 그림자를 밟노라'는 
서울시내 궁궐의 구석구석을 훑으며 수백년 전 왕들의 자취를 따라간 지난 10년의 기록이다. 
창덕궁·경복궁·덕수궁·창경궁을 배경으로 민화풍의 상상을 덧입힌 그림 40여점이 걸렸다.

보름달 뜬 경복궁 추녀마루 위로 꽃사슴이 날고, 창덕궁 연못에선 토끼들이 배를 타고 노닌다. 
향원정 앞엔 호랑이가, 덕수궁 석조전 위에는 늠름한 자태의 사자가 누워 있다. 
화가는 "고궁에 깃든 역사, 특히 문예 부흥기를 이끈 정조와 근대화를 꿈꾼 고종을 주목했다"고 했다.

달밤 고궁의 환상적 분위기 뒤에 온갖 상징이 숨어 있다. 
가령 '창덕궁 규장각 숫사슴'에서 뿔을 바짝 치켜들고 또랑또랑한 눈망울로 앞을 보는 사슴은 정조, 
그 뒤에 앉아 있는 부엉이 무리는 신하들이다. 
사석원은 "정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서 젊은 학자를 많이 등용했고 찬란한 문화를 피워냈다. 
알면 알수록 대단한 사람"이라고 했다.


	‘1895년 경복궁 향원정 호랑이’.
‘1895년 경복궁 향원정 호랑이’. 162.2×130.3㎝. 화가는“을미사변이 
나기 전 명성황후를 지키는 파수꾼 같은 모습으로 고종(호랑이)을 그렸다. 
고종에겐 인간적 연민이 느껴진다”고 했다. /가나아트센터 제공
3전시실의 대형 작품에 시선이 가장 오래 머문다. 
눈 내린 창덕궁에 붉디붉은 매화가 피었고, 부엉이 두 마리가 떡하니 자리를 차지했다. 
한 마리는 퍼드득, 날갯짓을 시작했다. 
제목 '1776년 3월 창덕궁 후원'. 정조가 25세 나이로 조선 제22대 왕에 즉위한 날이다. 
"서설(瑞雪)에다 겨울 끝나고 봄의 시작을 알리는 매화, 지혜를 상징하는 부엉이가 막 날려고 하는 모습으로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표현했습니다."

튜브를 캔버스에 직접 짜 바르는 육질(肉質)의 붓놀림은 여전히 폭발적이다. 이번엔 민화 기법을 많이 차용했다. 
'경복궁 향원정의 십장생'은 모란·소나무·거북이·불로초를 배경으로 순록이 달려나온다. 
'창덕궁 어수문'에선 잉어 두 마리가 부용지에서 뛰어올라 지붕까지 닿을 기세다. 
그는 "화사하고 해학적인 길상(吉祥)의 의미를 넣고 싶었다"고 했다.

현란한 원색의 향연에서 유독 눈에 띄는 그림이 있다. 
적막한 동양화풍의 '창덕궁 부용지 설경' 4점 연작. 사연이 있다. 
지난 2월 "창덕궁 만월문과 주합루를 그리고 싶은데 일반인 출입이 제한돼 있다"는 화가의 말에 문화재청 허가를 받아 
기자와 함께 창덕궁을 답사했다. 어수문 지나 주합루 2층에 올라 화가는 한참 동안 부용지를 내려다봤다. 
"해가 질 무렵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스산하면서도 위엄 있는 궁궐에서 제왕만이 가질 수 있는 외로움, 비장미를 느꼈지요. 
이미 완성한 부용지 그림을 버리고 흑백 톤으로 새로 그렸어요." 
다음 달 12일까지. (02)720-1020




화가 사석원 개인전 '고궁보월(古宮步月)-옛 궁에서 달의 그림자를 밟노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30길 28 가나아트센타

2015년 6월 12일~7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