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아트칼럼

[유경희의 ‘힐링의 미술관’] 창조의 적과 동지들…너무 잘난 제자 때문에 눈물만…

바람아님 2015. 7. 30. 00:20

매경이코노미 2015.06.15

 

‘그리스도의 세례’, 1472~1475년, 목판에 유화, 151㎝ × 177㎝, 베로키오. 제자 다빈치가 그린 천사(왼쪽 아래)가 더 뛰어나다는 평가에 낙담한 베로키오는 이후 조각가로 전환했다.

 

여러모로 나보다 실력이 뛰어난 후배와 부하와 제자를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하루아침에 동료나 부하직원이 내 상사가 돼 업무 보고와 결재를 요청해야 하는 입장에 놓이면 어떻게 할 것인가? 기죽어 한숨을 쉴 것인가?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며 험담을 일삼을 것인가? 반대로 당신이 선배와 동료를 물리치고 승진해 상사가 됐다면 어떤 태도를 견지할 것인가? 예술가들은 이때 어떤 태도와 입장을 취했을까?

서양미술사에는 너무 잘난 후배나 제자를 두는 바람에 존재감이 확 사라져 버린 불쌍한 미술가가 존재한다. 지오토를 제자로 둔 치마부에, 라파엘로를 제자로 둔 페루지노,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제자로 둔 베로키오 등이다.

그중에서도 다빈치의 스승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만큼 가엾은 존재도 드물다. 베로키오는 15세기 르네상스 시대 메디치가의 후원 아래 회화, 조각 등을 제작하는 대규모 공방을 이끌었다. 당대 실기와 비판이 오가는 예술담론의 학교와도 같았던 베로키오 공방은 피렌체 모든 젊은 미술가들이 열망하는 장소였다. 당연히 베로키오에게 한 수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베로키오의 작품은 실로 다방면에 걸쳐 수준급 이상이었다. 그런 작가가 너무 잘난 제자를 둬서 낭패를 봤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14세 무렵의 다빈치는 아버지 권유로 베로키오의 공방에 들어간다. 아버지는 당시 뚱보였던 다빈치의 살이라도 빼줄 심산으로 힘든 일을 시켜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웬일인지 베로키오는 도제생활 3년밖에 안 된 다빈치에게 자신과의 합작을 허용했다. 통상 이런 기회는 도제생활 6~7년이 지나야 가능한 일이었으므로 베로키오가 다빈치에게 굉장한 기회를 준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의 세례’라는 작품에서 세례의식을 돕는 천사를 그리게 한 것(2명 중 오른쪽 천사만을 그렸다는 설도 있다).

흥미로운 일은 이때부터 일어났다. 스승과 제자가 함께 그린 이 그림은 두 사람의 재능을 비교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다빈치가 그린 천사에 매료당했다. 다빈치가 그린 천사는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명암이 눈에 띄고, 스승이 그린 두 인물은 딱딱하고 거친 느낌을 강하게 준다. 베로키오는 다빈치의 천사를 보고는 자신이 구닥다리가 된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이런 비교를 당한 베로키오는 노력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천부적인 재능에 좌절했던 것 같다. 한 역사가는 기록했다.

“어린아이의 솜씨임에도 너무나 뛰어났다. 그가 그린 천사는 베로키오 자신의 것에 비해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를 본 베로키오는 더 이상 붓을 들지 않았다.”

이 사건 이후 베로키오는 조각가로 전공을 바꿔 버렸다.

실력을 인정받은 다빈치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사실 견습기의 다빈치는 스승에게 전적으로 순종했다. 그는 미켈란젤로처럼 불손하지 않았다. 당대 최고 공방이었던 기를란다요 공방에서 수학한 미켈란젤로는 훗날 스승으로부터 별로 배운 것이 없다고 투덜거렸다. 그는 공방에 들어가는 것도, 공방을 여는 것도 거부했다. 공동작품에 혐오감을 느꼈고, 모든 작품이 전적으로 자신의 것이길 바랐다. 이처럼 어떤 권위에도 굴복하지 않은 최초의 미술가가 된 미켈란젤로에 비하면 다빈치는 부드럽고 겸손한 태도로 스승과의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베로키오 공방에서 교육과정을 모두 이수했을 뿐 아니라, 도제생활이 끝나고도 바로 독립하지 않고 협력자 자격으로 여러 해 동안 스승 곁에 머물렀다. 게다가 다빈치는 “스승을 능가하지 못하는 제자는 무능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말에 따르면 다빈치는 자기 작업에 대한 확신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스승보다 탁월하다는 의식을 뚜렷이 갖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스승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고 판단했고, 부성애를 가진 스승의 편안한 그늘을 필요로 했던 듯하다. 비록 수천 쪽에 달하는 다빈치의 수첩에서 베로키오라는 이름이 한 번도 나타나진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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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맞춤’, 1923년, 조각, 브란쿠시.

 

사실 베로키오만큼 서양미술사에서 불편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는 드물다. 그는 도나텔로, 마사초, 브루넬레스키 같은 압도적인 세대 다음에 위치하며 다빈치, 보티첼리 같은 제자를 두는 실수를 저지른다. 그게 바로 운이라는 것일 게다. 이런 배경 때문에 베로키오의 작품은 걸출한 선배들과 제자들 틈바구니에 처박혀 그야말로 미술사에서 중요하지 않은 연결고리처럼 치부돼 버렸다.


당대 미술사가인 바사리는 다빈치를 길러낸 것 이외에는 베로키오의 다른 공적을 인정하지 않았다. 베로키오에게 주역을 돋보이게 하는 조역의 역할을 맡긴 것. 시쳇말로 희생양이다. 제자를 한층 영예롭게 하기 위해 스승을 깎아내리면서, 베로키오를 벌이가 변변치 못하고 하청받아 일하는 사람, 그리고 기품이나 재능보다는 근면성과 악착스러움 때문에 성공한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와 좀 다른 경우도 있다. 오귀스트 로댕은 후세대 조각가들에게는 넘어야 할 산 같은 존재였다. 당시로선 함께 일해보자든지, 제자가 돼보지 않겠느냐는 로댕의 제안을 거절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에밀 앙투안 부르델은 33세에 로댕의 제자가 됐다. 사실 그 나이에 누군가의 제자가 된다는 건 매우 드문 일. 그만큼 미술계에서 로댕의 권위가 막강했다는 뜻이다. 1861년 가구공의 아들로 태어난 부르델은 고향 마을의 장학금으로 에꼴데보자르에 입학하나 금세 아카데미즘의 고리타분함에 회의를 느껴 학교를 자퇴한다. 독학으로 공부한 부르델은 로댕의 눈에 띄어 33세부터 47세까지 15년간 제자로 지낸다. 참으로 오랜 세월 그저 로댕의 제자로만 머물던 그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부르델은 스승의 작품을 사랑하고 존경했지만 한 가지 불만이 있었다. 로댕의 작품이 세련미와 열정으로 충만하지만, 조각 고유의 특성이라 할 구조적 견고성이나 덩어리가 지니는 힘에 있어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부르델이 스승의 그늘에서 벗어나 완전히 자기만의 개성을 획득하기 시작하는 것은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아폴론(1901~1910년경)’부터다. 부르델이 이 작품을 로댕에게 보여주자 두 시간 이상 작품 앞을 떠나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아마 그때 로댕은 부르델을 떠나보낼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부르델은 ‘아폴론’에서 서양 조각이 오랫동안 간과하고 있었던 고대 그리스 아르카익기 조각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함과 건강함 그리고 고딕적인 아름다움을 되살려냈다. 부르델은 로댕과의 결별 이유로 스승의 복잡한 여성 편력을 문제 삼았지만, 실상은 더 이상 그의 곁에 머물다간 예술가로서의 생명에 치명적인 타격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로댕의 제자가 되는 길을 애초부터 거부한 조각가도 있다. 루마니아 태생으로 파리에서 활동한 콘스탄틴 브란쿠시다. 그는 1904년 에꼴데보자르에 입학하고 살롱전에도 출품하게 됐을 때 로댕의 눈에 띄게 된다. 로댕은 브란쿠시의 작품을 보고 자신의 작업실에서 함께 일할 것을 권유한다. 그렇지만 브란쿠시는 거장의 프로포즈를 단칼에 거절한다. “큰 나무 밑에서는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그는 로댕의 영향으로 아류에 머물까 봐 두려워했고, 그런 판단은 옳았다. 덕분에 브란쿠시는 로댕과는 전혀 다른, 그래서 서양조각사에 빛나는 독특한 추상조각을 내놓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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