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전시·공연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 展

바람아님 2015. 9. 29. 01:49
신동아 2015-9-24

격동하는 역사와 민족의 지난한 현실이 개인의 삶에 어디까지 스며들 수 있는지 가늠해보고자 할 때 적어도 한국의 근현대 미술사에선 이쾌대(1913~1965)만큼 적합한 인물이 없다. 이쾌대는 월북화가로 금기시됐다가 1988년에야 해금되면서 대중에 알려지기 시작한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만석꾼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열렬한 연애 끝에 결혼해 네 아이를 낳았고, 일본 유학까지 다녀와 이중섭 등과 함께 한국 화단에서 유명세를 떨친 그의 인생이 뒤틀어진 것은 6·25전쟁이 발발하면서부터다. 만삭인 아내를 두고 갈 수 없어 서울에 남았다가 인민군의 선전 활동에 협력해야 했고, 연합군의 서울 수복 때 붙잡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혔다. 포로교환 때 가족이 있는 남(南)이 아닌 북(北)을 택한 이유는 아직 정확히 밝혀진 바 없다. 북한 체제를 비판하다 숙청됐다는 얘기가 있는 것을 보면 북한에서의 삶도 순탄치 않았던 듯하다.

 

무희의 휴식, 1937, 캔버스에 유채
군상4, 1948년으로 추정, 캔버스에 유채
군상4, 1948년으로 추정, 캔버스에 유채

인물화의 대가, 한국적 리얼리즘의 선구자, 유럽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사조를 한국적 정서와 결합한 화가…. 해금 후 그의 작품이 발굴되자 미술계가 “한국 미술사를 다시 써야 한다”고 흥분했을 정도로 이쾌대의 예술세계는 완성도가 높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인물들의 표정. 족두리를 쓴 무희의 눈빛과 앙다문 입술에선 조선 여인들의 굳은 심지와 결의가 전해져온다(‘무희의 휴식’).

압권은 대작 ‘군상’ 시리즈다. 광복을 맞은 조선인들의 환희, 감격, 공포, 걱정 등 만 가지 감정이 가로세로 2m의 캔버스에 펼쳐졌다. 그의 제자인 서양화가 김숙진은 “아침에 선생님 댁에 간 적이 있는데, 이불 속에서 ‘군상’ 인물들을 스케치하고 계셨다”며 “어떻게 모델 없이 수십 명의 인물을 드로잉할 수 있는지 그저 감탄스러웠다”고 회고했다.


이번 전시는 1991년 신세계갤러리 회고전 이후 서울에서 처음 열린 대규모의 이쾌대 기획전이다. 40여 점의 작품과 100점이 넘는 미공개 드로잉 등 출품작 대부분을 유족이 내놨다. 오랜 금기의 세월 동안 작품들을 꽁꽁 감춰둘 수밖에 없어, 공공미술관 등이 소장한 이쾌대 작품은 매우 드문 형편이다. 김예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는 “전시에 나온 4점의 ‘군상’ 중 3점은 유족, 1점은 개인 소장이라 이 4점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기회는 앞으로 드물 것”이라고 말했다.


● 일시2015년 11월 1일까지

● 장소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 관람료무료 (덕수궁 입장료 별도)

● 문의mmca.go.kr, 02-2022-0600

1 카드놀이 하는 부부, 1930년대, 캔버스에 유채 2 부인도, 1943, 캔버스에 유채
1 카드놀이 하는 부부, 1930년대, 캔버스에 유채 2 부인도, 1943, 캔버스에 유채

1두루마기 입은 자화상, 1940년대 후반, 캔버스에 유채

2부인을 그린 드로잉, 종이에 연필

3운명, 1938, 캔버스에 유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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