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10.22

권영빈/한국고전번역원 이사장
최근 벌어지고 있는 역사 교과서 논쟁은 소모적이다. 논쟁의 주제를 잘못 설정해 놓고 부질없는 공방을 벌이고 있다. 역사 교과서를 바르게 쓰자는 주제와 국정이냐 검인정이냐는 논쟁은 별개 트랙이다. 국정은 나쁜 역사 교과서이고 검인정이면 좋은 교과서라는 잘못된 등식에서 논쟁의 오류가 생겨났다.
원래 검인정교과서는 국정보다 진화된 형태다. 다양한 관점과 균형 잡힌 시각으로 청소년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선진형이다. 국정은 대체로 독재 또는 후진국에서 쓰는 정권의 일방적 주입식 교과서 편찬 방식이다. 이게 일반론이다. 그러나 우리의 교과서 현실에선 이런 일반론을 적용할 수 없다. 보수 정권이 역사를 왜곡 미화했듯, 진보 또한 민중 또는 진보 성향 관점에서 역사를 왜곡 미화하길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전 보수 정권 시절 국정교과서를 보자. 5·16 정변을 부정부패 정권을 무너뜨린 영웅적 거사이고 혁명으로 기술했다. 정권 연장의 수단에 불과했던 10월유신이 민족중흥이라는 말로 미화 포장되었다. 북의 김일성은 가짜다. 항일 독립운동가 김일성은 일찍이 죽었고 젊은 김일성이 이를 도용했다고 당시의 국정 사회도덕 교과서는 썼다. 북엔 마치 뿔 달린 도깨비들이 사는 세상처럼 그려졌다. 이러니 북한에 다녀온 작가 황석영이 “북에도 사람이 살고 있구나”라는 탄식을 했을 정도다.

이런 경험에 비춰보면 ‘국정’은 악이고 ‘검인정’은 선이다 라는 일반론은 우리 현실과 맞지 않는다. 국정교과서가 보수 정권 미화에 기여했듯, 검인정 또한 386세대들 간에 팽배했던 민중사관의 영향 아래 역사를 새롭게 왜곡했다. 박근혜 정부가 이번 사안을 국정이냐 검인정이냐는 프레임으로 몰고 가지 않고 역사 교과서를 바르게 쓰자는 방향으로 논의를 시작했다면 사정이 이토록 꼬이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 교과서가 정치 문제로 비화하고 국민의 관심사로 떠오른 데는 역사학자들의 책임이 일차적으로 크다. 폭압 정권에 굴복해서 역사를 미화했든, 항거를 위해 왜곡했든 그 책임은 역사가에게 있다. 그렇다면 역사학자들이 차제에 발 벗고 나서 이를 시정하자고 앞장설 줄 알았다. 이번만큼은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올바른 교과서를 만들자고 두 손 들고 나설 줄 알았다. 그런데 현실은 거꾸로 가고 있다. 역사 학회 이름으로, 대학 이름으로 국정은 안 된다고 거부하며 국정교과서 집필을 한사코 반대한다는 시위를 하고 있다. 이것이 두 번째 오류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역사가다(Every man is his own historian)’라고 미국의 역사학자 칼 베커는 말했다. 누구나 과거를 지니고 산다. 때론 일기도 쓰고 과거를 회상하며 반성의 자료로 삼는다. 과거의 잘잘못을 귀감 삼아 미래를 대처한다. 이 점에서 역사가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공동체의 역사나 다중의 역사를 쓰는 경우 아마추어로선 어렵다. 여기서 스페셜리스트인 역사가가 등장한다. 엄정 중립과 균형을 요구한다. 프로는 아마추어와 달라야 한다.
일기 쓰듯 역사 교과서를 쓸 수는 없다. 사실에 입각해 자료를 수집하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다수가 인정할 다중 공통의 역사, 한 나라의 역사를 써야 한다. 특히 청소년을 위한 교과서는 더욱 신중해야 한다. 역사적 평가가 어려운 ‘가까운 과거’는 유보하고 연대기적 기술을 해야 한다. 어디까지를 역사로 보고 어디까지를 현재로 보느냐는 시대 구분에도 합의해야 한다.
‘풀과 가위’의 역사라는 말이 있다. 사실에 없는 일을 풀칠로 덧씌우고 보기 싫은 과거는 가위로 잘라내는 역사의 반역행위를 역사학자 콜링우드는 그렇게 표현했다. 풀과 가위의 역사로 얼룩진 우리의 역사 교과서를 언제까지 후대에 물려줄 것인가.
진정한 역사가라면 풀과 가위의 역사를 벗겨 내는 작업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역사 전공자들이 모두 손 빼고 나 몰라라 할 때 우리의 역사 교과서는 또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그때 가서 나는 그곳에 없었다고 알리바이를 주장할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참여를 통해 바른 역사를 바로 써야 한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역사가들의 시대적 과제다.
권영빈 한국고전번역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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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평인 칼럼]한국사 자습서는 더 위험하다
동아일보 2015-10-21
역사적 근거 찾을 수 없어
확인 않고 내지르는 자습서 교과서보다 한술 더 떠
박근혜 국정화 옳지 않지만 문재인도 건설적 대안 내놓아야

노덕술이 고문 경찰관인 것은 분명하지만 설마 김원봉 같은 당대의 정치 거물을 고문까지 했겠냐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근거를 찾아봤으나 찾을 수 없었다.
김원봉 연구서는 염인호 서울시립대 교수의 ‘김원봉 연구’(1993년)가 가장 상세하다. 어디에도 김원봉이 노덕술에게 뺨을 맞고 고문을 당했다는 말은 없다. 다만 여성 독립운동가 정정화의 회고록 중 “김원봉이 노덕술로부터 모욕적인 처우를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는 말을 인용하고 있다. 정정화의 회고록은 부정확한 데가 많은 데다 이 말은 전해 들었다는 것이어서 신뢰도에 문제가 있다. 그것을 믿는다 하더라도 모욕적인 처우가 고문이었다면 고문이라고 하지 모욕적인 처우라고 에둘러 말했겠느냐는 의문이 남는다.
염 교수는 또 한상도 건국대 교수의 ‘김원봉의 생애와 항일 역정’(1990년)을 인용해 “김원봉이 묶이어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의 사무실로 끌려가자 장택상은 노덕술에게 화를 내며 ‘모셔 오랬지, 누가 이래라 했느냐’고 짐짓 황망해하면서 묶인 것을 풀어줬다”고 쓰고 있다. 이 말은 본래 1984년 당시 길진현 중앙일보 기자가 쓴 ‘역사에 다시 묻는다’에 김원봉의 의열단 동지였던 전 광복회장 유석현의 증언으로 나와 있던 것이다. 이 증언은 증언 날짜나 장소가 나와 있지 않아 사료적 가치가 의문시된다. 그래서 염 교수는 길 기자의 1차 자료를 인용하지 않고 교묘히 한 교수의 2차 자료를 인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증언을 좀 더 보면 “김원봉은 장택상과 노덕술에게 그런 수모를 당하고 나(유석현)에게 와서 사흘을 꼬박 울었다”고 돼 있다. 증언을 사실로 믿는다 해도 김원봉이 당한 수모라는 것이 기껏해야 수갑에 채워져 끌려갔다는 정도다. 김원봉이 뺨을 맞거나 고문당했다면 그런 내용이 담겨 있어야 하는데 없다. 증언에서 알 수 있는 유일한 내용은 김원봉이 수갑에 채워져 끌려갔으며 당대의 정치 거물이었던 그가 그것을 몹시 수치스럽게 여겼다는 정도다. 그럼에도 이 증언은 김삼웅 등 언론인 출신 아마추어 역사가들에 의해 김원봉 고문설로 확대 재생산되는 데 이용됐다.
김원봉은 당시(1947년) 김구와 결별하고 좌익연합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에 들어가 있었다. 그 전해 정판사 화폐 위조 사건 이후 공산당의 박헌영이 미군정의 체포를 피해 사라진 자리를 김원봉이 메우고 있었다. 김원봉은 대구 폭동의 민전조사단 단장 자격으로 경상도 지역을 방문하기도 했다. 김원봉은 미군정의 요(要)주의 인물일 수밖에 없었다. 김원봉은 일시 체포됐다 풀려난 후에도 1년 가까이 남쪽에 남아 있다가 북쪽으로 갔다. 그의 월북은 체포보다는 여운형의 암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고 봐야 한다.
광복이 됐는데도 친일파 경찰이 왕년의 항일 운동가를 고문한다는 만평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 노덕술의 김원봉 고문설보다 더 극적인 사례는 찾기 어렵다. 노덕술은 고문 경찰관으로 악명이 높아서 그를 악마화해도 견제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오히려 이런 데서 한국 현대사 연구자들이 갖고 있는 좌편향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사 교과서도 문제지만 자습서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우리 자녀들이 이런 교과서와 자습서로 공부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분명 옳은 해결책이 아니다. 그러나 문재인 대표도 국정화는 안 된다고만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한국사에서 현대사 비중이 비정상적으로 커진 것은 노무현 정권 때다. 문 대표가 현대사 분야를 과감히 축소하는 대신 검정제를 유지하자는 식의 건설적인 제안을 한다면 국정화 고시 전에라도 불필요한 국론 분열을 막을 합의가 가능하지 않을까.
송평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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