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2030 프리즘] 게으른 게 아니라 좌절한 겁니다

바람아님 2015. 10. 23. 20:25

(출처-조선일보 2015.10.23 송혜진)


송혜진 주말뉴스부 기자 사진대학 시절 잡지사에서 객원기자 아르바이트를 했다. 

회사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원고지 한 장에 3000원인가 4000원인가 받았던 것 같다. 

내 원고만 써서 넘기면 되는 일은 아니었다. 바쁜 선배들 대신 원고량이 넘치는 단신 기사를 고쳐넣고, 

기사 팩트를 확인하기 위해 전화를 걸어 "이게 맞나요?"라는 질문을 반복했다. 

선배들 대신 택배를 받아 정리했고 밤엔 과자나 떡볶이 심부름을 했다. 

때론 지방 출장도 갔다. 모두 내 '고료' 외의 일이었고, 그걸 한다고 돈을 더 받는 것도 아니었다. 

야근한 날엔 택시비가 모자라 한두 번은 집까지 걸어서도 갔다. 

그래도 즐거웠다. 이렇게 일을 배워두면 '진짜 기자'가 될 날이 올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때 내겐 희망이 있었다.


최근 몇몇 잡지사들이 '어시스턴트' 제도를 없애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어시스턴트로 일하던 한 대학생이 과도한 업무와 적은 임금을 참지 못하고 고용노동부에 '근로계약 위반'이라고 신고했고, 

그 회사가 큰돈을 물어준 뒤 빚어진 일이다.


어시스턴트는 기자가 되고 싶어 하는 대학생이나 졸업생을 인턴처럼 부리는 제도다. 줄여서 '어씨'라고 부르는데, 

자기 기사 작성 외에도 온갖 잡일을 다 떠맡는다. 촬영할 때 필요한 무거운 소품을 나르는 일도 한다. 

몸과 머리를 동시에 쓰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대부분 월 100만원도 채 못 받는다. 

그래도 이 제도가 유지될 수 있었던 건 그동안 많은 이들이 이걸 '부당 노동'이라기보단 '도제(徒弟) 시스템'으로 인식해왔기 

때문이다. 돈은 아무래도 좋았다. 선배에게 일을 배우는 게 훨씬 더 중요했다. 그게 지금은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열정 페이' 소리를 듣기 딱 좋다.


소식을 듣고 몇몇 선배들은 분노를 표시한다. "요즘 청년들은 참을성이 없어. 취업이 그렇게 힘들다면서 왜 못 견뎌?" 

"돈을 적게 받더라도 훈련을 해야 커리어가 생기는 거 아냐?"

대학생 조카에게 이 얘기를 전했더니 '피식' 비웃는다. 

"견뎌서 커리어가 생기면 하죠. 그래봤자 안 생기는 걸 이젠 다들 아니까 안 하는 거죠." 

"……."

요즘 청년들은 이미 알고 있다. 

그렇게 견뎌봤자 자신이 정규직이 될 확률은 구운 계란에서 병아리가 나올 확률만큼이나 낮다는 걸. 

열정 페이를 견뎌서 '열매'가 생길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아마 견뎠을 거라고, 누군들 커리어를 쌓고 싶지 않겠냐고 

이들은 항변한다. 요즘 '헬조선'을 말하는 청춘을 두고 "게으르게 불평만 한다"는 지적이 나돈다. 

조카의 말을 듣고 깨달았다. 절망이 게으름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커리어를 만들 희망을 회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이들에게 열정이란 동력도 찾아오리라는 것을.




<각주 : 열정페이 - 무급 또는 아주 적은 월급을 주면서 취업준비생을 착취하는 행태를 비꼬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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