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10.24
자료에 의하면 에바는 죽음을 불사한 사랑을 맹세했다고 한다. 히틀러는 죽기 오래전에 작성한 유서에서 상속의 첫 번째 대상으로 에바를 지목했다고 한다. 희대의 살인마이자 인류 최대의 악인인 히틀러에게도 격렬한 러브 스토리가 있었던 것이다. 사회적 악인이 역설적이게도 개인 단위에서는 목숨을 건 사랑의 주체이자 대상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에서 존재의 두 층위가 드러난다. 개인과 사회라는 층위다. 라인홀트 니부어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개인의 도덕적 행위와 사회의 도덕적 행위가 엄격하게 구별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 놀랍게도 개인 단위에서의 도덕이 사회 단위에서의 도덕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관계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도덕· 정의는 개인 단위에서 출발하지만 사회적 단위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돌아보라. ‘선한 개인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선한 개체들이 모여 사회를 이룰 때 선한 사회가 저절로 보장되지 않는다. 개인 단위의 도덕과 사회 단위의 도덕이 서로 다르고 때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나만 열심히 착하게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도대체 ‘착하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나름 ‘착하게’ 살아온 지난 5년(2007~2011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7만1916명이 자살했다. 이는 최근 전 세계에서 발생한 대표적인 전쟁 사망자보다 훨씬 많은 숫자다. 이라크전쟁 사망자 3만8625명의 거의 두 배가량,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전쟁 사망자 1만4719명과 비교하면 거의 다섯 배에 이르는 규모다. 먼 옛날의 이야기도 아니고 지난 10월 3일 보건복지부에서 발표한 통계의 결과다.
얼마 전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때문에 온 나라가 발칵 뒤집어졌다. 만일 어떤 전염병으로 5년 사이에 7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가정해 보라.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높은 자살률은 전염병보다 더 끔찍한 사회문제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내가 아니라고? 그렇다면 누구인가? 그것은 ‘나’의 확산인 ‘우리’다. 누가 이 통계 앞에서 과연 착하게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물론 개인 단위에서는 잘 살고 있고, ‘무려’ 착하게 살고 있다고까지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국가 중 자살률이 1위이고, 게다가 최근 10여 년 동안 자살률이 급증하고 있다면 ‘사회적 우리’는 과연 착하게 잘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관계적 삶은 선택이 아니라 존재의 문제다. 말 그대로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마르틴 부버). 사회적 관계가 존재에 선행한다.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사회적 관계가 먼저 있었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사회적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각 개인은 ‘선택의 여지없이’ 존재의 두 층위에서 살아간다. 하나는 ‘나’이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다. 온전히 착하게 사는 것은 나·우리의 영역에서 동시에 잘 사는 것이다.
니부어는 “(순전히) 개인적인 윤리로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영역”이 있고, 그것이 바로 “정치의 영역”이라고 이야기한다. 착한 ‘나’들이 잘 살려면 ‘나’의 사회적 집합인 ‘우리’가 더불어 잘 살아야 한다. 이 사회적 역학이 정치다. 그러니 정치가 개판으로 돌아가면 수없이 많은 선한 개인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사회적 악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개인에게 관계적 상상력, ‘나의 확산’인 사회에 대한 고민과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한 것이다.
개인 단위에서 훌륭한 시인도 역사 단위에서 얼마든지 오명을 남길 수 있다. 희대의 고문 기술자도 가정에서는 훌륭한 아빠이자 남편일 수 있다. 이러니 착한 삶, 올바른 삶은 얼마나 멀고 어려운가. 그러나 길은 멀어서 갈 만하고 여럿이 함께 가면 없던 길도 만들어진다. 정치가 중요한 이유가 이것이다. 그러니 개인들이여, 겹눈을 가지고 바깥을 사유(思惟)하자.
오민석 시인·단국대 교수 영어영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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