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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굴기의 꽃산 꽃글] 마가목

바람아님 2015. 10. 27. 01:11
경향신문 2015-10-26

자지러지는 단풍을 본다. 목석 같던 나의 몸도 놀라는 재주는 가지고 있구나. 자연의 화장술에 탄복하다 보면 어느 새 정상이다. 시선을 앞으로 당기면 단풍만큼 붉은 열매가 보인다. 웬만한 산의 정상이라면 빠지지 않는 마가목 열매다. 그 나무는 나를 곧장 울릉도로 데리고 간다.

사연이 있다. 4년 전 여름. 꽃공부에 입문하고 처음으로 간 울릉도, 나리분지에서 하룻밤을 자고 추산 마을로 내려와 등대가 있는 태하까지 우산(于山) 버스를 이용했다. 버스에는 할머니 몇 분이 타고 있었다. 우산 속처럼 고요하던 버스가 우리 일행이 타자 금방 왁자지껄한 만원버스가 되어버렸다. 기사는 친절했고 승객들은 따뜻했다. 무거운 배낭을 덥석 받아주신 할머니가 우리의 정체를 알고 던지는 말씀. “저 가로수가 다 마가목인데 열매가 관절에 그리 좋아요.” 나의 무릎은 몹시 부실하다. 등산할 때는 그런 대로 올라가지만 내려올 때에는 애를 먹는다. 그래서 그랬나. 잘 외워지지 않던 나무의 이름들인데 마가목은 단박에 쏙 들어왔다.


이튿날. 와달리 옛길을 빠져나와 내수전 전망대에 서니 울릉도의 한쪽 면과 그 앞바다가 일거에 들어왔다. 도동항과 저동항이 보이고 관음도, 죽도, 성인봉이 바다에 혹은 하늘에 시퍼렇게 떠 있었다. 이것은 내 눈이 좋아하는 멀리 있는 풍경이다. 시큰한 내 무릎이 찾는 경치는 바로 가까이에 있었다. 전망대 근처에서 몹시 심하게 부는 바람을 따라 휘청휘청 부러질 듯 흔들리고 있는 건 마가목이 아니겠는가. 나는 단박에 깨달았다. 어제 버스 속 할머니가 그냥 함부로 하셨던 말씀이 아니란 것을. 낭창낭창 마구 흔들리는 마가목 나무가 전신을 동원하여 지금 관절에 좋을 수밖에 없는 성분을 생산하고 있다는 것을.


그때 버스 속의 할머니는 헤어질 때 이런 말씀을 주셨더랬다. “마가목 열매 따러 또 와!” 어김없이 가을은 오고 열매는 익었건만 때를 맞추어 울릉도에 가진 못했다.

마가목 나무는 지팡이용으로도 좋다고 했다. 그것에 의지하기 전에 거리마저 붉게 물든 가을 울릉도에 가서 마가목 열매 기운을 흠뻑 쬘 수 있다면 좋으련만. 마가목. 장미과의 낙엽 교목.


<이굴기 | 궁리출판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