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11.07
내게 편지는 ‘말하기에는 없는 그 무엇’을 전달해 주는 간절한 소통의 매개체로 다가온다. 편지에는 입술과 성대를 움직여 말하는 소리의 언어로 전달되지 않는 그 무언가가 있다. 종이에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한 자 한 자 새겨지는 글자들은 지금 내 곁에 없는 사람을 향한 그리움을 생생하게 일깨운다. 돌이켜보니 어린 시절 나를 키워준 팔할은 편지였던 것 같다. 꼬맹이 시절에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께 편지를 쓰다 보니 금세 초등학생이 되었고, 방학 때마다 담임선생님께 편지를 쓰다 보니 훌쩍 중학생이 되었고, 여고 시절엔 친구들과 ‘회색노트’를 돌리며 수업시간에도 부지런히 ‘편지질’을 하다가 어느덧 대학생이 되었다. 대학 시절에는 군대 간 남자친구에게 매일 편지를 쓰면서 저절로 문장력이 늘어 버린 것 같다. 아쉽게도 그 수많은 편지는 이제 서로에게 전혀 남아 있지 않지만.
그러고 보니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내가 오래전에 보낸 편지들의 안부도 궁금해진다. 십중팔구 유실되거나 불태워졌겠지만 말이다. 지금 와서 옛날에 내가 보낸 편지를 다시 볼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그래도 못내 궁금하다. 내가 그때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실어 그 수많은 사람에게 편지를 보냈는지. 편지에는 e메일이나 문자메시지에는 없는 ‘기약 없는 기다림’이 있다. 디지털 메시지의 생명은 속도지만, 손편지의 생명은 기다림의 설렘이다. 너무 빨리 답장이 오면 오히려 김이 샌다. 그 사람이 내 편지를 향해 얼마나 많은 망설임을 담아, 얼마나 깊은 정성을 담아 답장을 써줄지 궁금해하며 우체부아저씨를 기다리는 동안 서로의 관계는 물론 내 마음도 깊어진다.
옛사람들이 보낸 편지를 읽다가 눈물겨워지는 순간도 있다. 정약용이 유배 시절 형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선비의 자존심을 지키느라 분명 배를 곯고 있을 형을 향한 아우의 절절한 심경이 그대로 전해진다. 그는 형에게 절대로 체면을 차리지 말고 하다못해 개고기라도 가리지 말고 먹으라고 조언한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내 동생이 유배를 떠났다면, 내 동생이 굶주리고 있다는 사실이 안 봐도 훤할 지경이었다면 나는 주저 없이 동생에게 무슨 동물이든 눈 딱 감고 잡아먹어 반드시 살아남으라고, 우린 꼭 다시 만나야 한다고 편지를 썼을 것이다. 편지에는 사연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영혼이 실린다. 손편지는 다른 인쇄물과 달리 오직 원본이 하나뿐이다. 편지는 이 세상에 단 한 번뿐인 절절한 교감이 스며 있는 것이다.
편지는 때로 더없이 소중한 역사적 자료가 되어 준다. 공식적인 사료에 남아 있지 않은 그 수많은 개개인의 숨은 사연들이 편지에는 숨은 그림처럼 은밀하게 스며 있다. 고흐의 편지가 소중한 이유는 고흐의 영혼을 속속들이 이해할 수 있는 최고의 자료가 바로 테오에게 보낸 편지이기 때문이다. 고흐와 테오가 몇 년 동안 파리에서 같이 지낼 때는 편지를 주고받을 필요가 없어 고흐의 파리 체류 기간의 일을 제대로 알 수 없는 게 아쉬울 지경이다.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너무도 사랑스럽고 따뜻한 심성을 지닌, 편지 예찬론자였다. “편지는 지상 위의 존재들에게만 허락된 기쁨입니다. 신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기쁨이지요.” 진정 그렇다. 신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서 결코 손편지의 이 애틋한 즐거움을 빼앗지는 못할 것이다.
정여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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