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6.01.09 곽아람 기자)
[곽아람 기자의 그림 앞에 서면]
거칠게 잘려나간 머리칼 땅에 닿지 못한 뒤꿈치 어깨에 앉은 새…
恨을 풀어주고픈 염원이 조각에 생명 불어넣어
낮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갔다고는 해도 한겨울, 청동으로 만든 상(像)이 차가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소녀상 옆 의자 아래에 꽃다발이 공물(供物)처럼 놓여 있었다.
세상을 떠난 위안부 할머니들의 빈자리를 상기시키기 위한 의자다.
일본 정부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 꼭 쥔 두 손 사이에 누군가 보라색 꽃과 장갑을 올려놓았다.
거칠게 잘려나간 소녀의 머리카락은 고향으로부터 강제로 단절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머리에 씌워진 털모자의 술이 왼쪽 어깨에 앉은 새에 닿아 있었다.
새는 세상을 뜬 할머니들과 이승을 이어주는 매개다.
소녀 맨발의 뒤꿈치는 땅에 닿지 않았다. 할머니들이 고향에 돌아와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기 때문이다.
'끝까지 지킬게요!' '힘내세요!' 같은 문구가 적힌 메모지가 발치에 붙어 있었다.
소녀상은 더 이상 조각이 아니었다. 위안부 할머니 그 자체로 여겨지고 있었다.
미술은 세계를 재현하고자 하는 욕망의 소산이다.
과학기술이 발달하기 전 전통사회에서 3차원의 조각은 그 욕망의 최대치를 반영했다.
조각의 힘은 관람자로부터 온다.
관람자의 간절한 바람이 투영되면 흙이라든가 청동이라든가 돌이라든가 하는 재료의 물성(物性)에서 벗어나
생명력을 얻게 된다.
상아로 만든 여인상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아내로 삼고 싶다 기원했더니 신(神)의 가호로 상이 사람으로 변했다는
피그말리온 신화는 조각의 속성을 잘 반영한 이야기다.
소녀상 조각가 김운성·김서경 부부는 종교는 없지만 조각의 힘을 믿었다.
그들은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 내길 기도하며 상을 만들었다.
2011년 12월 지금 자리에 상을 놓고 일본의 진심 어린 사죄에 대한 염원을 담아 절을 했다"고 말했다.
일본 소설가 미야베 미유키의 '괴수전'을 최근에 읽었다.
흙으로 빚은 인형이 인간의 원한과 분노를 동력으로 살아 움직이게 된다는 이 소설은
세상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일본 전통 신앙을 근간으로 한다.
120㎏ 청동 덩어리 소녀상의 이전 문제를 놓고 일본이 민감하게 구는 것은
그들이 이 조각의 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恨), 그리고 그 한을 풀어주고픈 우리 염원의 에너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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