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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비정규직의 숨통 조이는 귀족노조

바람아님 2016. 3. 2. 00:12
[중앙일보] 입력 2016.02.29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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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논설위원·경제연구소장


‘미생’ 장그래는 비정규직 근로자의 설움을 상징한다. 장그래는 온갖 부당한 대우를 받고도 비정규직이란 이유로 그저 참고 지내야 했다. 이렇게 드라마로 극화한 비정규직 근로자의 이미지는 비정규직 문제 완화에 얼마나 도움이 됐을까. 장그래가 정규직 전환에 실패한 것처럼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장그래의 모습은 비정규직은 무조건 없어져야 할 일자리라는 비합리적인 인식만 심어줬을 것으로 보인다.

 비정규직 자체는 나쁜 게 아니다. 비정규직은 경제 환경과 산업구조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등장한 근로형태여서 존재가 불가피하다. 문제는 정규직에 대한 기득권 때문에 임금과 고용기간, 직무 참여·승진 기회에서 비정규직을 차별하는 노동시장의 비정상적인 이중구조다.

 비정규 고용은 세계적인 흐름이다. 국내 노동시장에서도 과거부터 임시직 같은 형태로 비정규직 근로가 존재했다. 그래도 별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외환위기를 계기로 기업이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속속 대체하면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이런 이중구조는 온갖 부작용을 초래한다. 한 직장에서 같은 일을 해도 정규직은 거의 종신고용을 보장받고 비정규직은 임금을 올려줄 때쯤 해고된다. 신자유주의 바람 속에 기업의 감량경영이 이를 부채질해 왔다.

 정부는 부작용 완화를 위해 2007년 7월 기간제 및 단시간 보호에 관한 특별법을 시행해 비정규직을 2년 이상 고용하지 못하게 했다. 비정규직을 일회용으로 쓰고 버리는 관행을 차단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기업은 고용한 지 2년만 되면 비정규직 근로자를 싹둑 자르고 있다. 비정규직 보호법이 비정규직 해고법이 됐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비정규직은 이제 임금 근로자의 32.5%(627만 명)를 차지하면서 노동시장의 핵심 기둥이 됐다. 경제구조의 고도화와 서비스산업 발전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다. 경제활동인구조사에 따르면 비정규직의 49.3%가 자발적인 사유로 현재 일자리를 선택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비정규직에는 정규직을 찾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취업하는 경우가 많지만 학업·결혼·육아, 짧은 근로시간 선호 등에 따른 자발적 취업자가 적지 않다는 얘기다.

 비정규직이라도 더 오래 취업하고 싶은 근로자가 적지 않다. 새로운 기간제법은 이런 수요를 수용해 35세 이상 근로자가 희망한다면 4년까지 일할 수 있도록 했다. 계약기간의 쪼개기를 금지하고, 3개월만 일해도 퇴직금을 주도록 해 비정규직 보호를 대폭 강화했다. 그런데 정부와 협상을 벌인 노동단체가 반대하면서 무산되고, 정부도 이를 덮어두기로 했다. 비정규직 가운데 나름대로 형편이 나은 기간제가 이런 지경이니 더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는 파트타임 근로자의 고통은 더 클 수밖에 없다.

 노동단체의 주장에 부화뇌동해 기간제법 개정을 반대한 일부 정치인은 4년제로 되면 평생 비정규직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사자에게 의견을 물어보기나 한 걸까. 9.5%에 이르는 청년실업률을 알기나 한 걸까. 당장 청년 한 명을 비정규직에 모집해보라. 하루 만에 수십 명이 몰려온다.

 기간제 보장 기간이 4년으로 늘어나면 근로자로선 더 많은 일을 배우고 조직에도 능력을 인정받을 기회가 많아진다. 그러면 최소한 무기계약직이나 온전한 정규직으로 전환될 가능성도 커진다. 한자리에 눌러앉아 4년간 일하면 직무능력은 크게 향상될 수밖에 없다. 기업에서도 자르기 쉽지 않다는 얘기다. 근로자로선 손해 볼 게 없는 ‘플러스섬’의 방안이 4년제다. 현재 비정규직 근로자의 정규직 전환율은 20%에 못 미친다. 그나마 추세적으로 전환율이 떨어지고 있다.

 이같이 새로운 기간제법은 비정규직이 일할 기회를 크게 강화하고 있는데도 대기업·금융회사·공기업 정규직만 챙기는 탓에 귀족노조로 불리는 노동단체가 틀고 나서면서 좌초됐다. 철밥통 노동단체 간부는 고용불안을 걱정하지 않으니 비정규직 근로자의 고충을 피부로 체감할 리 없다. 기간제를 비롯해 비정규직 근로자 대다수는 노조 가입이 그림의 떡이다. 비정규직을 대변할 권한도 의지도 없는 귀족노조는 더 이상 비정규직 근로자의 숨통을 조이지 말라.

김동호 논설위원·경제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