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동료 공격해야 내가 생존"..한국판 배틀로얄

바람아님 2016. 3. 4. 00:13
매일경제 2016.03.03. 17:24

◆ 내부갈등에 무너지는 한국사회 ⑥ 경쟁을 넘어선 '고투' ◆

"아이 학급에서 회장 선거가 있었는데 공부를 못하는 친구가 회장이 됐다. 알고 보니 반 아이들이 일부러 그 친구를 뽑았더라. 학급 임원을 하면 대학 입시에서 가산점을 받게 되는데, 아이들끼리 단합해 가산점을 받아도 아무 소용없는 아이를 회장으로 만든 거였다. 라이벌에게 가산점이 가면 안 되기 때문이다."(서울 서초구·52·가정주부)

입시를 앞둔 자녀를 둔 한 주부가 전하는 고등학교 학급 회장 선거 사례는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는 일그러진 경쟁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선의의 경쟁은 개인·기업·국가가 발전하는 원동력이 된다. 자원이 빈곤한 후발 개발국가인 우리나라가 놀라운 경제적 성취를 이룬 배경에는 사회의 치열한 경쟁 분위기가 생산적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지금 우리 사회는 다른 사람을 짓눌러야 내가 생존할 수 있다는 생각, 즉 경쟁을 넘어선 투쟁의 정서가 팽배하다는 것이다.


국민대통합위원회의 '한국형 사회 갈등 실태진단 보고서'는 한국 사회에서의 경쟁이 상생과 협력보다는 '승자독식사회' '제로섬 게임'식으로 변모해가는 현실을 염려했다. 연구진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 출현한 경쟁 사회의 '속살'은 경쟁을 넘어선 투쟁의 구도를 취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우리 사회가 이 같은 극단적인 경쟁을 하게 된 배경은 '불안을 넘어선 강박' 증세와도 무관하지 않다. "사회에서 낙오하면 끝"이라는 두려움과 부족한 사회적 안전망에 경쟁은 더욱 격화되고, 상대방을 이기는 것만을 경쟁의 최종 목적으로 삼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같은 승자독식 사회에서는 능력이 다양한 개인과 집단이 협력하고, 실패를 통해 교훈을 얻고 창의성을 키우는 일이 어렵게 된다.


살아남기 위한 투쟁의 역사는 출생신고부터 시작된다. 12월에 아이를 낳은 부모들이 다음해 1월로 출생신고를 허위로 하는 기현상을 낳고 있다. 아이에게 '가짜 생일'을 갖게 하면서까지 출생신고를 허위로 하려는 이유는 12월생이 되면 유치원-초등학교로 이어지는 교육 과정에서 발육이 빠른 또래 아이들보다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다. 한 부모는 "12월에 출생신고한 아이는 초등학교 입학 시 연초에 태어난 아이들에 비해 10개월가량 선행학습에서 뒤지게 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서울시 출생통계에서 2010년부터 2015년까지 12월과 이듬해 1월 출생신고 건수를 비교하면 1월에는 출생신고가 30% 급증하는 추이가 계속 나타난다.


생존을 위한 고투는 입사 이후 더욱 치열해진다. 제한된 승진 기회를 놓고 다수가 경쟁해야 하는 회사에서 '윈윈(Win-Win)'은 생각하기 어렵다. 국내 한 대기업에서 3년째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B씨(29·여). 그는 인사 시즌이 다가올 때마다 선배들이 보여주는 '꼼수' 때문에 화가 치민다. 인사철마다 팀원들을 서로 상대평가해 등급을 매기도록 하는데, 회사 선배들이 자신이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위해 자신 아래의 후배들에게는 낮은 평점을 주라고 강요하고 있어서다. 그는 "회사에서 경쟁은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가해 또는 공격하는 행위'를 포함하는 개념"이라며 "처절하게 살아남는 선배들의 모습은 현실에서 펼쳐지는 '배틀로얄'인 것 같다"며 씁쓸해했다. '배틀로얄'은 2000년 제작된 일본 영화로, 무인도에 갇힌 고등학생들이 생존을 위해 동급생끼리 서로 목숨을 빼앗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연구진은 "한국 사회에서 정보 공유와 협력을 통한 선의의 경쟁을 찾아보기 힘들어졌고, 사회에서 나타나는 많은 경쟁의 형태가 '네가 아니면 내가 죽는' 투쟁적 경쟁의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며 "현재 한국인이 맞이하고 있는 경쟁은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서 남에게 해를 입히는 것도 서슴지 않는 단계로까지 나아간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전성환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지원국장은 "무한경쟁의 장 속에서 낙오하는 것에 대한 집단적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안전망을 강화할 수 있는 정책 마련이 시급하다"며 "서로 신뢰하고 협력할 때 우리 사회 전체가 '공유지의 비극'을 넘어 사회적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도록 문화적인 접근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문조 고려대 명예교수 / 김희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