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정신 기억하는 중국인 발길 이어져"
(다롄=연합뉴스) 홍창진 특파원 = 26일인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 순국 106주기를 앞두고 24일 찾은 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시 뤼순(旅順)구의 뤼순감옥박물관 곳곳에는 일제에 저항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숨진 순국열사들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100년 전부터 러시아·일본·중국의 군항이 차례로 위치한 뤼순은 원래 군사제한구역으로 분류돼 중국인만 방문할 수 있었으나 2010년 10월 이후 대외개방 문호를 넓혀 외국인도 자유롭게 찾게 됐다.
뤼순감옥박물관은 1907년부터 1945년까지 만주 일대를 침략한 일제의 형무소로 쓰이면서 수많은 한·중 항일운동가들이 수감됐다.
일제 침략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안 의사가 이곳에 갇혔다가 순국했고,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申采浩.1880~1936) 선생과 우당 이회영(李會榮.1867~1932) 선생이 여기서 옥사했다.
중국에선 성(省) 또는 시(市)가 운영하는 박물관이 무료이기 때문에 별도의 매표절차는 없다.
30명가량의 관람객이 모이자 박물관 안내원이 지하감옥으로 통하는 철창문을 열면서 방문투어를 시작했다.
맨 처음 나타난 곳은 일제의 감옥규칙을 위반한 수감자와 반항하는 수감자를 가뒀던 '암방'(暗房)이었다. 각 방의 넓이는 2.4㎡이며 내부는 캄캄하고 축축해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바깥벽엔 간수가 감옥 안을 감시하도록 작은 원형 감시창을 하나 뚫어뒀다.
안내원 방(龐)씨는 "조선과 중국의 독립투쟁가, 사상범이 감옥에 오면 고분고분하게 만들기 위해 암방에 많이 가뒀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1층으로 올라가니 간수휴게실이 나오는데 현재는 역대 형무소장 명단과 당시 간수가 쓰던 가죽채찍, 밧줄 등을 전시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형무소 서쪽에 안중근 의사가 갇혔던 감방이 있지만 최근 내부공사 준비 중이라 관람객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건물 2층에 신채호 선생이 갇혔던 '35호 감방'과 이회영 선생이 옥사한 '36호 감방'이 나란히 있었다.
감방 내부는 20여 ㎡ 넓이에 6~7명을 함께 수감했으며 출입구 반대편 벽에 작은 창문이 뚫렸다.
감방문 왼쪽벽 상단에 수감자 번호표가 붙었고 강철문짝에 설치된 철망으로 내부를 감시하도록 돼있다. 문짝 오른쪽벽엔 신채호·이회영 선생의 약력과 뤼순감옥에 투옥돼 옥사하기까지 경위를 설명한 패널이 걸렸다.
무장항일투쟁을 주장하는 '의열단 선언'을 집필한 신채호 선생은 1930년 일제에 항거한 혐의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감옥에서 복역한 지 6년 만에 순국했다.
이회영 선생은 사재를 털어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운동 근거지를 확보하려 다롄으로 가던 중 체포돼 일제의 모진 고문을 받고 순국했다.
옛 형무소 뒷마당을 거쳐 높이 4m 정도의 담벼락을 따라 100m 정도 가면 사형집행을 하던 교수형장(絞刑場)이 나온다.
1930년대 건립된 이곳은 안 의사의 실제 처형장소는 아니지만 일제의 교수형 과정을 보여줘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내부엔 사형수가 밧줄에 목매고 서는 1㎡ 넓이의 나무판과 함께 지하 바닥에 나무통이 놓였다. 형무소장이 '관동군 사령관 명령에 따라' 사형집행을 선언하면 나무판 경첩이 열려 사형수가 허공에 매달려 숨지고 시신을 통에 담아 바깥으로 가져간다.
박물관은 안 의사가 처형된 원래 사형실을 리모델링해 '안중근 의사가 의로운 죽음을 한 곳'(安重根義士就義地)이란 간판을 내걸었다.
출입문으로 들어서니 안 의사 흉상이 있고 주변에 관람객들이 바친 추모 꽃다발이 가득했다. 벽에는 의사가 수감생활에 쓴 유묵의 복사본 54점이 걸렸다.
옆 방 30여 ㎡ 공간엔 사형집행 직전 안 의사가 어머니로부터 전달받은 흰 한복과 두루마리를 입고 의자에 앉은 사진과 함께 당시 처형장이 재현했다. "내가 죽은 뒤에 내 뼈를 하얼빈공원 곁에 묻어 뒀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반장해 달라"는 유언과 함께 쑨중산(孫中山·쑨원) 등 중국 저명인사들의 안 의사에 대한 평가도 볼 수 있다.
충칭(重慶)에서 온 중국인 관람객 저우(周)모(26)씨는 "중국인들도 이토를 격살하고 최초로 항일투쟁의 기치를 든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고 사랑한다"며 "추모하는 마음을 전하고자 여기에 왔다"고 말했다.
박물관 안내원 방씨는 "매년 이맘 때가 되면 한국인 뿐만 아니라 안 의사의 희생정신을 기억하는 중국인의 발길이 이어진다"면서 "입장권을 팔지 않아 정확한 관람객 숫자를 얘기할 수 없으나 하루 수백명씩 찾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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